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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불교의 의미는 뭔가' 지광스님·청고스님 대담 :"너와 난 둘 아닌 하나 부처 눈으로 서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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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광스님=외국인 스님이라서 그런지, 먼저 어떤 생각으로 불교에 입문했는지 궁금하군요.

청고스님=책으로 불교를 접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종교 시리즈를 읽다 불교의 포용성을 알게 됐고 그 이후로 심취하게 됐습니다.

지광=보니까 일반인들이 불기(佛紀)의 기원을 혼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즈음해 불기 몇년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서 그런지 탄신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실은 부처님 입멸(入滅)하신 다음해가 기준입니다. 부처님이 젊어서 성도(成道)하셨지만 무여열반(無餘涅槃:번뇌를 끊고 육신까지 없애 정적(靜寂)에 들어간 경지로, 죽은 후에 들어가는 열반)이 돼야 사바세계의 모든 번뇌가 끝나고 진정한 부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죠.

청고=저는 어렸을 적부터 미국 생활 스타일이 왠지 어색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일곱살 때인가 인생은 결혼이나 재물을 취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광=우주 만사에 우연은 하나도 없어요. 청고스님을 보면 전생에 한국 아저씨였을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도 다 인연이라고.『열반경』에 보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잖아요. 스님 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나는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돌이켜보니 어릴 적에 스님들이 우리 집에 탁발 오시면 나도 모르게 쌀을 바가지로 퍼주곤 했거든요. 그때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이라고 하던 스님의 염불이 지금도 쟁쟁하게 들려요. 우리 인생의 반 정도는 전생에 이미 지어진 것이고 나머지 반 정도가 자기 의지로 이뤄지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다음 생도 아주 많은 부분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고. 지금 현생을 살면서 내생을 만들고 있는 셈이지요. 청고스님이 한국으로 건너온 것도 다 그런 인연에 따른 것 아니겠습니까.

청고=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저는 실천적으로 가장 잘 맞는 불교가 일본불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학교에서 대행스님(한마음선원 원장)의 법문을 듣고는, 저런 분이 있는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출가를 맘 먹고 나니 정말 자유로운 느낌이 들고,'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광=살다보면 궁금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왜 늙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라는 의문은 상당한 고뇌를 요구하는 것들이잖아요. 이런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거지요. 부처님을 숭배하는 이유도 왕으로서의 영화로운 길을 놔두고 고행을 택한 그 힘 아닌가요. 그건 분명히 억겁을 두고 닦으신 인연의 결과거든요. 부처가 되려고 원력을 세우고는 도솔천에 계시다가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도에 태어나신 거지요.

청고=저는 한국에 오기 전에 스카이다이빙을 20회 정도 했는데, 인간의 가치는 결코 몸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광=인간은 늘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풀려는 발전지향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바로 다른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사랑과 자비심의 정도에 있어 동물과 사람은 급수가 다릅니다. 정신계적인 나를 위해 물질계적인 나를 희생할 줄 알거든요. 9·11테러 후 미국 하버드 대학 등에서 한국 승려들을 초청하는 것도 정신계적인 나를 돌보지 못했다는 반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고=많은 서양인이 참선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지광=지구촌 시대를 맞아 앞으로 청고스님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와야지요. 이 지구촌을 신의 이름이 아닌 자비심으로 보듬어야겠어요.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거든요. 곧 전세계가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 되기 위해 우물안 개구리식 시각을 버려야 할 때기도 하고요.

청고=미국에서는 동양스님을 좋아하고, 한국에서는 미국스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한국 스님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언어 장벽이 큰 원인인 것 같습니다.

지광=분명히 말하지만 한국불교는 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 1876년 메이지유신때 불교계에서도 승려들을 유럽으로 많이 보냈거든요. 우리의 경우 신도들은 이미 국제화돼 있고, 외국인들은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들어오는데…. 국가 전략적 차원에서도 한국불교 사상을 수출할 좋은 기회잖아요. 미국 진출도 새로운 차원에서 청사진을 그려야 합니다.

청고=물질세계에 젖은 미국인들로서는 한국불교를 경험하고 실천해보고 싶어할 것 같습니다.

지광=불교의 특징은 비이중성(Nonduality)이거든요. 바로 내 안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를 예로 들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따로 있지요. 그러다보니 인간을 물질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그 바탕에서 유물론이 태동했거든요. 불교에서는 인간이 곧 부처라고 합니다. 다만 어리석음 때문에, 업(業)때문에 모두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업은 말과 생각, 행동으로 형성되는데 이것들을 잘 가다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청고=서양에서는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분석적인 사고가 더 심화되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과학을 새로운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음의 뿌리는 온통 우주로 연결돼 있는데, 서양의 모든 것을 보면, 예컨대 광고를 봐도 겉만 강조하고 있거든요.

지광=바깥 쪽을 잠깐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한국불교에도 나름대로 허약한 부분이 있지요. 바로 포교, 전파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청고=한국불교가 담고 있는 개념들을 행(行)해야 하는데 그 행이 드문 것 같아요.

지광=참선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선의 수행결과를 실천하는 전법 포교도 중요하죠. 일본불교는 이미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중국불교도, 물론 본토는 예외지만 대만의 경우 대규모 도심 사찰인 불광산사의 예에서 보듯 생활속의 불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조계종이 선종이어서 선(禪)을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생활과 불교가 유리된 점이 분명히 있지요.

청고=아내와 자식을 둔 몸으로 어렵게 출가를 결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불교를 알기 전에는 '그러면 아내와 자식은 어떻게 되나'라는 궁금증이 일었어요.

지광=출가는 절대 도피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위해, 인생의 완성을 위해 물질세계를 버리는 과감한 도전이지요. 영원을 위해 현실을 버리는 겁니다. 일단 깨달은 다음에 다시 중생을 제도하게 되니까, 엄격히 따지면 출가자의 입장에서는 절대 아내와 자식을 버리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아이가 내 아이가 되고, 그러면 이쁜 사람 못 생긴 사람 구분도 서지 않지요. 그런 경지에서는 나와 너를 가르는 장벽도 없고, 나의 신(神), 너의 신 같은 장벽도 없어집니다.

청고=9·11 테러 후에 인터넷에서 아주 인상 깊게 읽은 편지가 있습니다. 너무 너무 위대한 편지였어요. 모든 것이 날아간 그 순간, 그때까지 중요했던 것들이 전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모든 욕심이 사라져버렸어요. 탐욕이 모두 사라진 그 순간을 영원히 잡아 두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깨달음과는 다르겠지만 뭔가 통하는 대목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광=바로 그런 마음이 출가심이란 거지요.

청고=제가 지금까지 한국말을 못했다면 너무 안타까워 했을 겁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스님이 너무 적어요. 출가하면 영어 공부를 거의 안하죠. 지광스님같은 분과 지금까지 인연을 맺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손해본 듯한 기분이 듭니다.

지광=티베트 불교는 영어공부를 정말 많이 시키지요. 달라이 라마가 그랬다지요. 중국에 나라를 잃었지만 세계를 얻었다고. 서양인들이 티베트 불교에 열광하는 첫번째 이유는 티베트 승려들이 서양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청고=저는 아직 수행을 많이 경험하지 못해 수행의 세계를 정확히는 말하지 못합니다.

지광='이 뭐꼬'라는 화두를 들다보면 어느 순간 간절한 맘끝에 깨달음이 오는데 그게 돈오돈수의 경계라 하겠지요.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파사나처럼 한단계 한단계 밟아가는 것이 돈오점수라고 하겠습니다. 정통 화두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런 전통이 외국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수행을 그들에게 전달하기는 참으로 어렵죠.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말 한마디를 할까요. 이 세상은 안과 밖이 따로 없거늘, 밖에서 들어오는 것 안에서 들어오는 것, 그 모두를 다 부처님의 뜻으로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모두를 부처님으로 대접하면 모든 것이 다 풀려요. 번뇌조차, 망상조차 부처님의 선물입니다. 그 모두가 부처님의 배려죠. 그게 곧 깨달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청고=논리를 앞세우는 서양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힘들어하는 대목입니다.

지광=괴로움을 안겨 준다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나는 중생에 지나지 않아요. 성불(成佛)이 따로 없거든. 모두를 부처로 보는 것이 성불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맘이 부처의 맘이 됩니다. 저 사람을 중생으로 보면 나도 중생일 뿐이지요.

청고=세속의 제 나이와 삶을 궁금해하는 한국인들이 많더군요.

지광=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고 했어요. 이 문에 들어오는 때는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뜻인데 쉽게 풀이하면 출가하면 세속의 전력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쓰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것도 철저한 정진 수행을 위해 연을 끊는 것의 하나거든요.

정리=정명진 기자

지광스님 약력

▶1980년 언론계에서 강제해직

▶85년 능인선원 창건

▶현재 능인선원 원장, 동국대학 겸임교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한국불교대학원 대학 이사장

청고스님 약력

▶미국 워싱턴 주 출생

▶오하이오주립대학 산업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1993년 출가(은사 혜거스님)

▶동국대 선학과 석사과정 졸업 예정

부처님은 온누리에 자비를 전하려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 불교계는 산속수행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어느날 문득 '이게 아닌데!'라는 회의가 들어 한국으로 출가한 청고(靑高)스님이 불기 2546년 부처님 오신날(19일)을 앞두고 15일 한국 불교 최대의 포교사찰인 능인선원 원장 지광(智光)스님을 찾아 불교의 가르침과 그것이 현대에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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