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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아들들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志晩·44)씨의 구속은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또다시 히로뽕 투약 혐의를 받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이제야말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린 그를 마음에서 싹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윤락녀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마약을 복용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더욱 할 말이 없다.

지만씨 구속에 자책·허망감

똑같은 혐의로 벌써 다섯번째 처벌을 받는다니…. 지금까지 그에 대해 선처를 요구했던 우리들의 온정이 너무 헤펐던 게 아닌가 하는 자책과 분노와 허망감이 교차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연루된 각종 스캔들에 넌덜머리가 난 때여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박절한 사회에서 박지만씨를 껴안고 가려고 했던 것은 참으로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그는 '혁명가' '독재자' '경제개발의 역군'의 외아들이면서 권력이나 재물을 탐한 흔적이 없다. TV 등에 나타난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불안한 그림자가 서려 있어 모두들 안쓰러워했다. 대통령인 아버지가 총탄에 쓰러졌고 영부인인 그의 어머니도 훨씬 이전에 같은 운명을 밟았다.

저격당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케네디 2세의 앙증스러운 모습에서 세기의 슬픔을 느꼈듯 우리들은 두번의 국상(國喪)에서 눈물 흘리던 박지만씨의 애잔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갓 입교할 당시의 지만씨는 생전의 국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 아버지로부터 처음 얻어맞은 적이 있다.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그처럼 그는 구식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40을 훨씬 넘어서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노총각으로 지내 왔다. 박근혜씨를 포함한 3남매 가운데서도 그는 언제나 외톨박이 인상을 주었다. 그가 중소기업의 대표이사로서 경영수완을 발휘한다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 때마다 이제는 본격 재기하는 것이겠지 하고 모두들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몇년 걸러 한번씩 그는 마약복용자로 윤락녀와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세상에서의 소외감, 고독과 좌절 그리고 불안에 떠는 그를 선처해 달라는 소리가 이어져 왔던 것은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다.

창덕궁을 지날 때마다 조선왕조 최후의 무대가 되었던 낙선재의 텅빈 공간의 적요를 느낀다. 순종의 황태자인 영왕이나 고종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슬픈 운명을 마감한 이후 세월이 단절되었다. 우리들의 긴긴 왕조시대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상징적 인물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외국의 국왕이나 왕자 또는 공주 이야기를 부럽게 들을 뿐이다. 박지만씨는 그 빈 틈을 뚫고 들어온 비운의 대통령 아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강석씨가 친부모를 죽이고 자살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의 아들 재국씨가 부친의 비자금과 관련돼 조사 받았을 때,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 재현씨가 역시 6공 비자금 사건으로 정치의 뜻을 접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권력에 적극 개입한 혐의로 구속됐을 때 그리고 이제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홍업·홍걸씨까지 각종 비리에 관련되면서 우리들은 '대통령의 아들들'에 대한 보잘것없는 기대와 희망마저 내던졌다. 이제 정녕코 박지만씨도 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오래 전부터 대통령 가족이 갖는 권력의 파괴적인 힘에서 비켜나 있다고 해서 계속 우리 옆에 둬야 할 것인가.

사회가 또 껴안을 수 없을까

나는 마약 상습 복용자인 그의 사회 복귀를 간절히 희망한다. 그는 대통령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이미 버림 받은 자로 사회가 다시 껴안는 노력을 거푸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그가 법에 따라 치료 감호를 받으면서 소외된 자의 친구로 땀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반백이 되기 이전에 그가 가정을 이루는 날을 또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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