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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 속 청춘남녀 '대담한' 키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평양 도착 이튿날인 5일 오전 5시50분. 숙소인 보통강호텔을 조깅복 차림으로 나섰다.

이른 시간인데도 휴일을 맞아 60명 가량의 강태공들이 곳곳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평천구역에 산다는 기업소 노동자 김철기(47)씨는 빈 어망을 보이며 "(시장에서) 사가기라도 해야 마누라한테 엄중한 조사를 안 받겠다"며 웃었다. 새벽부터 부산을 떤다고 구박을 받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곤란하다는 것.

바로 옆 해양훈련단 운동장에서는 잠에서 깬 선수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고 있었다. 국가대표 카누·수영 선수 등을 양성하는 이곳의 감독은 "세계 수준에는 모자라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월드컵이 서울에서 열리는데 아느냐'라고 묻자 그는 "아리랑만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강변 한쪽에 만든 양어장은 물을 모두 빼버리고 채소를 대신 심어놓았다. 이유를 물으니 "새끼고기들을 아직 구하지 못해서"란다. 열대메기 양식 등 먹는 문제 해결이 쉽지만은 않은 듯했다.

점심 때 들른 호텔 1층 목란식당의 김주선 의례원(종업원)은 아버지가 내각 사무국에서 일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산 머리핀을 포장지에 싸서 건네자 "손님 앞에서 열어봐야겠구나"라며 풀어본 뒤 고맙다고 인사했다. 무작정 거절하거나 슬쩍 챙기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국제전화를 위해 호텔 종합사무실(비즈니스 센터)에 들렀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직원 박명순씨는 가슴에 단 김일성 배지에 기자가 관심을 보이자 "선생님도 통일이 되면 다실 때가 올 겁니다"라고 했다. "그건 무척 정치적 발언"이라고 답하자 그녀는 웃어 넘겼다.

갑자기 호텔 밖에서 취주악대의 연주와 주민들의 말소리, 노랫소리가 떠들썩했다. 흔들다리를 건너 섬 모양의 유원지로 다가가니 '뻐스기동대'라고 쓰인 버스 10여대를 타고 온 3백~4백명이 둥글게 모여앉아 있었다. 각 기관이나 지역별로 들놀이를 나왔다고 한다.

인민대학습당의 석·박사급 연구사들이라는 젊은 남녀 10여명이 "함께 드시고 가십시오"하며 기자를 끌어앉혔다. 용성맥주 한잔과 소시지를 권했다.이들은 돼지갈비와 떡·과일, 싱싱한 상추·오이 등도 준비해 왔다. 아리랑축전을 보러 온 남측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자 한 청년은 대뜸 "인민대학습당은 남조선의 국립도서관같은 곳" 이라고 설명했다.

돌이 갓 지난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들놀이 나온 아빠는 "얜 늦둥인데 내가 책임져야지"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애완견인 푸들을 데리고 나온 선글라스 차림의 40대 남자도 인상적이었다. 한낮이 되자 강변의 버드나무에서는 흰 꽃가루가 무척 날렸다. 평양의 옛 지명이 유경(柳京)인 게 이해가 갔다.

해질녘엔 강변 벤치와 잔디밭에 젊은 청춘남녀들이 하나 둘 자리잡았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던 여자는 등을 돌려 얼굴을 숨겼다.

잔디밭 너머 풀숲에서는 대담하게 입맞춤을 하는 연인들도 있었다. 어둠이 깔리고 나서도 이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보통강의 하루는 이렇게 시간에 따라 풍경을 바꾸면서 평양에 사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었다.평양=이영종 기자

평양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보통강(普通江)강변은 평양 사람들의 삶과 휴식의 터전이다. 이 곳에서는 남북회담 취재 때 만난 북한 당국자나 잘 훈련된 안내요원과 달리 풋풋한 살냄새가 나는 주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번 방북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였다. 3회에 걸친 아리랑축전 참관기에 이어 보통강변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싣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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