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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벽을 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팀이 멋진 경기를 하고, 16강에도 진출하면 물론 좋겠지만, 이보다는 원활한 경기운영, 세련된 손님맞이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외국인이 대회기간에 경험하는 것들이 국가이미지를 좌우한다. 88올림픽은 사실상 서울만의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전국 10개 도시에서 분산 개최된다. 상대적으로 세계화에 뒤처진 지방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조금은 걱정스럽다.

우리 역사에서 19세기까지는 중국을 쳐다보고 살았던 시대였다. 다음 50년간은 일본, 이후 50년간은 미국이 지향점이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비로소 세계를 전방위로 바라볼 수 있었다. 지구상에 실로 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나라마다 이념이 다를 수 있으며, 시장은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올림픽이 국민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해외여행·조기유학·영어학습·중국진출 등이 촉진됐다. 월드컵도 세계화를 한층 진전시킬 것이다.

TV에 비칠 10개 개최 도시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은 행선지를 영어로 적은 판자를 목에 걸고 미국으로 떠났다. 옆자리 승객과 말 한마디 못 나눈 채 수십시간 비행기를 탔고, 호텔 밖을 돌아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한 한국 선수들이 지금은 미국 프로무대에 진출했고, 일반 국민은 그들의 활약을 TV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엄청나게 세계화가 진행됐다 하겠다.

그렇지만 '촌닭'의 잔재는 아직도 우리 내부에 남아 있다.

박찬호가 소속팀을 옮기니까 응원 대상이 로스앤젤레스 연고팀에서 바로 텍사스 연고팀으로 바뀌었다. 올림픽에서 억울하게 우승을 놓쳤다 해서 국산 금메달을 만들어 걸어주었다. 어떤 광고는 한국팀이 세계 최정상의 축구팀과 맞붙어 이기는 것을 주제로 만들어졌다. 다른 나라 팀에는 져도 상관없지만 일본 만큼은 무조건 꺾어야 한다. 경기 자체를 즐기기보다 승부에 집착하고 실력에 관계없이 의욕만 앞세운다.

바깥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세계화와는 더욱 거리가 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내세우지만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시끄럽고 어수선한 나라로 각인돼 있다. 대형 사고·법규 위반·지도층 부패 등은 국가신용도를 낮추는 데 일조를 한다. 보신탕 논쟁에서 보듯 문화적 편견을 가진 외국인은 너무나 많다. 국가이미지가 나쁘면 어렵사리 수출을 해도 상품이 제값을 받지 못한다.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이 크지만 우리 스스로에도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90년대 중반 정부 주도로 세계화를 추진한 적이 있다. 세계화를 영어로 어떻게 표기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을 정도로 탁상공론에 치우쳤다. 자신을 과대평가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추진했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과도한 개방은 외환위기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큰 고통을 겪고 9개월 전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졸업했으나 국가의 실력이 그리 향상된 것 같지는 않다.

남은 기간, 특히 소프트웨어 측면의 취약점을 보강하는 데 주력해야겠다. 경기장은 번듯하게 지어놓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경기 당일 교통혼잡을 우려해 일반인의 차량 운행을 제한하는 것도 사실상 구시대적 발상이다.

성숙한 응원 문화 과시를

월드컵 기간 안전사고·무질서 등은 실시간으로 세계 방방곡곡에 알려진다. 조직위·자원봉사자·공무원·민간기업의 열정을 끌어내고 이를 한데 묶어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숙박·쇼핑·관광 모든 분야에서 고객만족을 극대화시켜야 하며, 다른 나라 경기도 응원하는 등 성숙함을 보여줘야 한다. 외국손님들이 한국의 정겨운 시골, 멋있는 전통문화를 접하는 기회도 많이 마련해야 한다.

과거에는 국가간에 벽을 쌓고서도 존립할 수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외부 힘에 의해서라도 벽은 무너지고 있다.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았던 비슷한 시기에 로마는 세계로 나가는 길을 닦았다. 진나라는 망했으나 로마는 패권국으로 도약했다.

월드컵 개최의 진정한 의미는 세계화를 방해하는 벽을 허물고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닦는 데 있다고 본다.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노하우, 세계 미디어에 비치는 한국의 역동성, 다양한 형태의 내외국인간 만남 등은 세계화를 위한 길이 돼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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