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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끝> "이제 시작일뿐… 후배여 나를 따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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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93년 8월 19일 경기도 용인 프라자 골프장에서 열린 남자 골프 프로테스트.

최경주는 첫 도전 관문을 단번에 통과했다. 4라운드 합계 2백90타로 4위였다. 뛸듯이 기뻤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취직도 쉽게 될 줄 알았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최경주는 플레잉 프로로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듬해 4월 경기도 성남 남서울 골프장에서 벌어진 매경반도패션 오픈은 그의 첫 데뷔무대였다. 첫날 이븐파를 친 데 이어 2라운드에서 1오버파를 쳐 컷오프를 통과했다. 4라운드 합계 8오버파 2백96타로 공동 43위.

주변에선 "첫 출전에서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쁘지 않은' 정도에 만족할 최경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골프는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당시 국내 프로골프 무대는 최상호와 박남신이 양분하고 있었다. 두 베테랑의 아성은 견고했다. 대회 출전이 거듭됐지만 우승은커녕 상위권 진출도 쉽지 않았다. 컷오프에 걸려 떨어지기도 다반사였다.

94년 한해 최경주가 공식 대회에 출전해 벌어들인 상금은 1천44만원. 홀로 생활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다.

최경주는 94년 10월 서울 강남의 한 실내 골프 연습장으로 자리를 옮겨 레슨 프로로 일하면서 꾸준히 투어에 참가했다. 손님이 모두 돌아가고 없는 오후 11시 이후는 혼자 연습에 몰두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그는 선천적인 장타자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거리가 약 20m나 더 나갔다.

어찌나 힘이 좋았던지 거죽이 터지고 부풀어올라 볼 자동 분배기 위에 얹을 수 없는 공이 여러 개씩 나왔다.

"퇴근도 안하고 밤 늦게까지 남아 혼자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대성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는 힘이 장사였고, 먹성도 좋아 하루에 다섯끼를 해치우곤 했다."

당시 그 골프 연습장을 운영했던 대한프로골프협회 유형환 홍보이사의 말이다.

최경주는 95년 5월 21일 경기도 용인 88골프장 서코스에서 끝난 팬텀 오픈에서 박남신을 2타차로 따돌리고 마침내 첫 우승의 감격을 안았다. '프로 골프대회에서 무명이 우승하기란 극히 힘들다. 그러나 신예 최경주는 달랐다. 프로 3년생인 최경주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고 우승까지 내달렸다.'

당시 중앙일보에 실렸던 기사다.

우승은 해본 사람이 하는 것-. 이후 최경주는 쾌속 항진했다. 이듬해 한국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97년엔 팬텀 오픈·PGA선수권·포카리 오픈 등을 휩쓸며 상금왕에 올랐다.

그리고 그해 10월엔 세계 32개국 대표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는 월드컵 골프대회 본선에 출전했다. 박노석과 한 조를 이뤄 출전했던 최경주는 이 때 미국 무대를 처음으로 경험했고, 언젠가는 이 무대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에 진출시키기 위해 '최경주 후원회'가 결성된 것도 이맘 때의 일이다.

98년 외환위기로 국내 투어가 축소되자 최경주는 해외 무대로 눈을 돌렸다. 첫 시도한 아시안 투어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자 당장 '국내용'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최경주는 묵묵히 투어 참가를 계속했다. 마침내 99년 일본 기린 투어에서 우승하고, 이어 그 해 우베 고산 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라 이같은 비난을 깨끗이 잠재웠다.

남은 것은 미국무대 도전-. 최경주는 결국 퀄리파잉 스쿨 최종 예선전을 거쳐 PGA에 첫발을 내디뎠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에 값진 첫 우승을 따냈다.

"컴팩 클래식 우승 이후 국내 팬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PGA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최경주 선수는 그동안 성원해준 국내 팬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한 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매 경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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