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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선씨육성테이프>자서전用 녹음서 밝힌 DJ와의 애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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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나는 이 정권과 DJ에게 피해망상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나의 모든 것, 정치에 대한 희망, 내 친구들, 나의 인생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자서전을 구술하는 녹음테이프 속에서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씨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崔씨는 검찰 출두를 앞두고 세개의 최후 진술성 녹음 테이프 외에 여섯개의 녹음 테이프를 더 남겼다. 이 여섯개의 테이프들에는 자신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특히 이 테이프를 들어보면 그의 일대기는 DJ에 대한 애정과 존경에서 출발해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과 증오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뉴스위크 한국판이 입수한 崔씨의 자서전용 육성 테이프 중 주요 부분을 발췌했다(표현은 가급적 원문을 살렸음).

◇DJ와의 첫 만남=내가 위스콘신대학 국제학생회장에 당선되었던 1982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시카고에서 연설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金대통령의 당시 연락책이었던 문동환 목사에게 나의 연락처를 남겨놓았고 金대통령과 통화를 하게 된다. 물론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망명한 거물 정치인이자 민주투사였으며, 내게는 선생님이었다. 이렇게 DJ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후 시카고에 오신 선생님을 호텔에서 직접 뵙게 되고 시카고대 연설회에도 참석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86년에 귀국한다.85년에 귀국한 DJ가 87년 대선에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겨우 27세. 나는 사비를 털어가며 김대중선생 대통령 만들기 모임을 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만날 때 응접실이나 식당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여사님이 함께 자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87년 대선 패배 후 나는 88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86년 이미 면식이 있었던 스칼라피노 교수가 재직 중인 버클리대학 석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과의 친분=버클리대학에서 나는 7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미국 내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나는 마약퇴치운동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이 운동에는 마이클 잭슨·스티븐 스필버그·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참여했다.

때마침 LA에서 마약퇴치운동을 위한 자선기금 모금파티가 열렸다. 이 파티에 나는 버클리대학 학생대표로 참가해 마이클 잭슨과 만나게 된다. 마침 마이클 잭슨은 바로 내 옆 테이블에 있었고 나는 주저없이 다가가 한국에서 온 아무개이며 당신의 팬이라 말했다. 마이클 잭슨은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알고 봤더니 그의 맏형인 재키 잭슨의 부인이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를 만난 지 석달째가 되던 8월 중순께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8월 29일 자신의 생일에 우리 가족을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생후 6개월 된 아들 대양과 함께 생일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은 다음날 대형 피아노가 놓인 그의 거실에서 그는 너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 주류사회를 알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그는 내 꿈을 실현하는데 힘이 되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주선을 해주겠다는 것. 또 유학생활을 세심하게 물어보더니 내게 장학금으로 수표 5만달러를 건넸다.

◇DJ 참모가 되다=96년 마이클의 내한공연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DJ의 호출을 받게 된다. 수행비서인 이재만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목동의 한 아파트로 갔다. 도착하니 이희호 여사님과 이모님이 계셨고 나는 안방으로 안내됐다. DJ는 침대 곁에 붙어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기를 권유하더니 다짜고짜 "이번 대선에 자네가 나를 도와야겠네. 이번에는 내 비서로 들어와 나를 도와줘야겠어."

97년 12월 21일 오전 6시 나는 당선자의 부름을 받고 일산의 자택으로 향했다.

"조지 소로스와 알 왈리드 왕자, 두 사람을 입국하게 해줘야겠네."

당선자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일종의 특명이었다. 서재를 물러나올 때 당선자는 내게 출장비로 미화 3천달러를 줬다.나는 지금도 당선자가 내게 직접 3천달러를 건네줄 때 정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신들의 텃세, DJ와의 결별=나는 당선자의 5인비서 중 하나였다. 5인비서는 이강래 특보, 장성민 부대변인, 박금옥 아태재단비서실장 대행, 고재방 총재비서실차장, 그리고 나(총재보좌역)였다. 그러나 동교동계로 대별되는 집권세력 중엔 나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당선자와 면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이뤄도 DJ는 나를 가장 먼저 방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이런 우대로 나는 점차 모난 돌로 주변사람들에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당선자 시절인 어느 날 회의가 열렸다.김한길 인수위 대변인, 박지원 당선자 대변인, 정동영 당 대변인, 이종찬 인수위원장, 이강래·김옥두 의원 등과 내가 참석한 자리였다. 회의 말미에 당선자는 취임식에 초청한 외국 귀빈들의 참석 현황을 잘 체크하라는 당부를 하셨던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답변을 하는 나의 말투와 자세가 불손하게 비쳤던 모양이다.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렇게 어색하게 회의는 끝났는데 김옥두 의원이 나를 불렀다. "자네 말투가 그게 뭔가. 보자 보자 하니까.이눔!"

DJ의 당선자 시절에 나는 마이클 잭슨의 북한 어린이돕기 자선공연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북한의 김정일을 초청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만 모 일간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나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프로젝트의 윤곽만 알려주었을 뿐인데…. 그 발표는 취임식장에서 당선자가 직접 언급해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돼 있었다.

김중권 비서실장이 나를 호출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플라자호텔에서였다. "이번 청와대 비서실 스타팅멤버에서 당신은 빠져야겠다.내부에서 너무 반발이 심하고 당선자께서도 지금 노발대발이시다."

정리=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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