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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단편소설 ‘날개’에도 등장 근대의 매력과 풍요가 흐르던 곳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 신세계백화점 본점 야경. 본관 건물은 1930년 10월 완공돼 일본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으로 개점했고 리모델링을 거쳐 2007년 2월 현재의 모습으로 재개장됐다. <2> 1980년대 서울 종로2가 화신백화점. 건물은 87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종로타워’라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3> 신세계백화점 본관의 중앙계단은 유럽 고대 건축물에 쓰인 라임스톤, 트래버틴 등 석재를 사용해 고풍스러움을 유지했다. <4> 본관 옥상의 ‘트리니티 가든’은 루이스 브루주아의 ‘거미’(사진), 헨리 무어의 ‘와상’, 호안 미로의 ‘인물’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들의 조형물로 꾸며진 작은 조각공원이다. 신동연 기자, 중앙포토


백화점은 근대의 상징이자 욕망의 시공간이다. 1852년 프랑스 파리 봉마르셰백화점이 처음 생긴 이래, 백화점을 도심에 세운 나라들은 하나같이 산업혁명 이후 공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문화와 예술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매개체 가운데 하나가 백화점이다.

도시화는 인구 집중을 불러왔고 시민들은 공간을 자본화하기 시작했다. 한 장소에서 다양한 제품들을 비교하며 일괄 구매하고 덤으로 지인들을 만나 문화까지 향유할 수 있는 백화점은 흔히 욕망의 환기구로 통한다. 욕망이 충족되는 공간이야말로 천국이다. 그래서 일찍이 백화점 예찬론자가 된 에밀 졸라는 백화점을 ‘상업의 대성당’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성당에서 침묵하는 신(神)에게 엄숙히 기도하던 시민들은 이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며 풍요로운 물신을 찬양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1910~1937)의 단편소설 ‘날개’ 끝 구절이다. 소외된 근대의 지식인인 주인공 ‘나’는 몇 시간째 거리를 배회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 올라간다. 나약하고 무능했던 ‘날개’의 주인공은 쇼핑이나 휴식을 위해 이곳을 찾은 게 아니다. 무의식적인 발걸음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 불현듯 겨드랑이에 가려움을 느낀다. 날개가 돋았던 자리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날개가 없다. 날아보자는 열망뿐이다. 그가 찾은 곳이 하필이면 왜 백화점 옥상이었던 걸까. 식민지 국가의 무기력한 개인은 근대의 매력에 도취되고 만다. 커피광이자 모던보이였던 이상의 시(詩)에도 백화점을 동경하는 대목이 보인다.

미쓰코시는 1930년 진고개(尼峴: 명동, 장동 일대)에 들어선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다. 일본 미쓰코시백화점 한국지점으로 신축되었는데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관은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옥상 카페와 조각공원은 고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날개’의 주인공이 살았던 1930년대에도 이곳은 이 나라 상류층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었다. 일본계 백화점이었지만 고객의 6~7할이 조선인들이었다.

백화점은 우리 근대문화사의 스펙트럼이다. 자발적인 근대화를 하지 못한 우리는 식민지 시절 일본 자본에 의해 세워진 백화점을 이용해야 했다. 일본은 1904년에 도쿄 니혼바시에 미스코시 본점이 들어섰다. 백화점은 일본인의 전통적인 일상을 잠식하고 그들을 근대적 소비의 주체로 불러낸다. 그리고 이내 식민지 조선에도 그대로 이식된다. 그 선두주자가 신세계백화점의 전신 미쓰코시백화점이다. 충무로 목조건물 3층에서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출장소 오복점(吳服店:포목점)으로 출발했다가 번듯한 신축건물에 엘리베이터와 미술관까지 갖추고서 밤마다 휘황한 네온사인을 밝히는 백화점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후로 진고개에 히라타·조지아·미나카이 같은 일본계 백화점들이 들어서면서 한국인 상권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맞서 자연히 민족계 백화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년 민족 자본가 박흥식(1903~94)이 1932년, 종로에 세운 화신백화점이 대표적이다. 박흥식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민족주의 마케팅으로 미스코시와 경쟁한다. 1933년 월간 삼천리 2월호 기사에 따르면 하루에 찾는 고객이 미쓰코시 12만6000명, 화신 11만7000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30만이었으니 믿기지 않는 수치다. 하긴 백화점이 수학여행 코스였다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박흥식의 민족주의 마케팅은 큰 호응을 얻는다. 1935년 1월 화신은 불이 나서 큰 타격을 입는다. 박흥식은 좌절하지 않고 전국에 화신연쇄점(체인점)을 공격적으로 설립, 조선 10대 자산가가 된다. 그는 일본인 자본가나 실업인들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전시 총동원정책에 적극 협조하고 만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수난을 당하고 화신백화점은 쇠퇴 일로를 걷는다.

한편 미쓰코시는 해방 직후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 종업원 대표가 관리하다가 적산(敵産)으로 편입된다. 이후로 전쟁을 겪으면서 겨우 명맥만 이어오다 1962년 동방생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1963년 동방생명을 삼성이 인수한다. 그해 11월 12일 고객응모행사를 통해 신세계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관 1층으로 들어간다. 백화점 1층은 백화점의 얼굴이요, 꽃이다. 최고 브랜드로 통하는 명품 매장들과 보석·향수 등 전략상품이 진열돼 있다. 따라서 궁전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것을 즐기며 점원들의 눈인사를 우아하게 받아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일단 귀족의 자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구매 능력이 없더라도 당당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 시기의 백화점 열기는 바로 이런 심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중앙 정면에 고풍스러운 계단이 보인다. 이 중앙계단은 유럽 고대 건축물에 쓰인 라임스톤, 트래버틴 등의 석재를 사용해 품격을 높였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중앙계단 앞에서 패션쇼가 열렸을 정도였다. 신세계백화점 명동 본점 옥상 트리니티 가든(Trinity Garden)은 아늑한 공간이다. 카페 소파에 앉아서 현대 미술의 거장들이 빚어낸 조각 작품들을 감상한다. 기다란 다리가 인상적인 거미는 유명한 작품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상징했다고 하는데 가느다란 다리가 자못 위태로워 보여서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매치시키려면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세대 엄마를 떠올리면 금방 느낌이 온다.

1930년대 이 옥상 위에서 ‘날개’가 돋기를 꿈꿨던 소시민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소비를 넘어 사치의 민주화가 된 오늘날, 입장료 없는 도심 속 생활 유원지는 더 이상 욕망의 분출구가 아니다. 찾는 이를 주연배우로 대접하고 즐거움과 휴식을 제공하는 잘 꾸며진 무대 같기만 하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kimkisan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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