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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없다는 청와대 말은 협박” “정부 청사만 와서 뭐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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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호 08면

세종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군의 건설 현장. 참여정부 때인 2007년 7월 20일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의 기공식이 열렸지만 지난해 10월 수정 방침이 정해지면서 공사가 사실상 중단됐다. [연합뉴스]

‘세종시 ㎞’.
경부고속도로 청원IC를 빠져 나와 충남 연기군으로 들어서는 96번 지방도 위. 목적지만 적힌 채 남은 거리는 빈 칸으로 남은 녹색 도로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만큼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던 ‘세종시로 가는 길’은 22일 국회에서 9개월간의 논란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국토해양위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된 것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 등 4개 관련 법안은 한나라당 친박계와 민주당·자유선진당의 반대로 부결됐다. 세종시는 9부2처2청 등 정부 부처 이전을 골격으로 하는 원안대로 추진되게 됐다. 수정안과 함께 이전이 거론됐던 삼성·한화 등 기업과 서울대 등도 이전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세종시 예정지인 충남 연기군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23일 연기군을 찾았다.

세종시 수정안 부결 뒤 충남 연기군은 지금

“다음 대통령 때 또 바뀔 거 같아 원안 하자는 것”
강변의 황톳빛 벌판과 논의 푸른 물결이 차창 밖을 흐르는 사이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이르렀다. ‘원안’ 세종시의 한가운데 위치한 이 마을은 앞으론 굽이치는 금강을, 뒤로는 260m 높이의 전월산을 뒀다. 이 야트막한 마을 뒷산이 세종시 ‘원안’의 중점이다. 사람들은 “전월산 꼭대기에 컴퍼스를 놓고 돌린 만큼이 세종시”라고 했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은 양화리 주민들에게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됐잖아요”라고 말을 걸었다. 주민들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아가씨는 어디서 왔어. 방금도 MBC인가 왔다 갔는데, 만날 와.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한 번씩 인터뷰 다 했다니께.”

황구익(70)씨가 운을 뗐다. “대통령이 공약으로다 행정도시를 활성화한다고 해놓고 1년 지나서 기업도시 맹근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를 조롱하는 거여.” 그는 “(6·2지방선거 때) 민주당이 되면 원안대로 해주지 않을까 해서 힘을 실어주려고 안희정(충남지사 당선자)을 찍었어”라고 했다.

연기군 남면 양화리의 마을 입구. 주민들은 매일 느티나무 아래 모여서 세종시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한주민은 “원안대로 돼야지”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옆에 있던 임월수(80)씨가 거들었다. “안희정이 좋아서가 아녀. (정부가) 행정도시를 무산되게 해놨응께, (행정도시) 되게 하라고 도지사 시켜준 거여.”
“한나라당 찍은 사람은 당원 중에도 없을껴. 이렇게 하고 표 달라면 되겄어.”
“심판했음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그래야 국민 위한 대통령이지.”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황씨가 이야기를 결론지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기업도시가 존지(좋은지), 행정도시가 존지 어케 알어. 근데 지금 수정안 허면, 대통령 바뀐 담에 또 바뀔 거 같응께 원안하자고 하는 거지….”

마을로 들어서자 단층집들 사이 머리를 내민 2층짜리 양화리사무소가 보였다. ‘세종시 수정안 전면거부’ ‘세종시 원안대로 건설하라’라는 문구가 쓰인 색 바랜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지난해 9월부터 걸어뒀다고 했다. 마을엔 빈 집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160가구 중 약 60가구가 보상금을 받고 대전이나 조치원 등으로 떠났다고 했다.

임붕철(59) 이장은 “정말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원안대로 세종시가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사하면 가족이 다 따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시가 잘 만들어지면 기업은 저절로 다 따라오게 돼 있다”고도 했다.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면 +α가 없다”는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의 얘기를 “협박이라고 본다”고 했다.

‘행복지구 금강살리기 생태하천조성사업’ 현장 인부로 일하는 임흥천(66)씨는 “고향 땅만 뺏기고 우리만 등 터져…”라며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빨리 착수해야 주민들이 사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젤 존 건 그냥 쭈욱 사는 거여. 670년을 넘게 산 고향인데, 떠나라면 좋겠어?”라고 되물었다.

남면 일대는 부안 임씨 집성촌이다. 양화리와 진의리에만 600가구가 넘는 임씨가 살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집성촌으로 ‘임씨 민심’이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2004년 ‘신행정수도’ 예정지로 결정됐을 때도 집성촌이 붕괴되고 선산이 망가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상경해 반대 시위를 벌였다. 결국 ‘신행정수도’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무산됐다. 대신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세종시가 추진되고 토지가 수용됐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수정안이 추진되면서 ‘임씨 민심’도 찬반으로 나뉘었다. 임흥천씨 역시 “난 반대혀도, 수정안 찬성하는 사람도 한 3분의 1은 될 거여. 남면 사무소 앞에 가 봐. 거 가면 찬성하는 사람들 있어”라고 알려줬다.

수정안으로 갈라진 부안 임씨 집성촌
남면 사무소 앞의 컨테이너 가건물에는 ‘세종시 원주민 비상대책위원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하는 이 단체의 기획실장인 임근창씨 역시 양화리 옆 진의리에 사는 부안 임씨다. 그는 “수용기간이 벌써 7년째다. 아산신도시 만든다고 세종시와 같은 시기에 토지 수용을 시작했는데 우리만 표류한다. 무엇이든 빨리 돼야 한다”라며 “사업 진척 속도로 보나 원주민의 생활 안정, 경제활동을 위해서나 수정안이 낫다. 원안대로 되면 충청·대전권이 다 손해”라고 했다. 그는 “원안 고수 분위기니까 수정안이 좋은데도 말도 못 꺼냈다는 분들이 많았다”며 “공공기관만 있는 대전 사람들도 세종시 기대감이 컸는데, 이렇게 돼버려서 아쉽다고 한다”고 했다.
진의리로 가는 차선은 ‘도로폐쇄’라고 쓰인 표지판으로 막혀 있었다. 양화리 땅은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반면, 진의리는 일부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공사용 덤프트럭 외엔 출입을 제한했지만 공사는 2년 넘게 지지부진하다. 마을 사람들은 표지판을 무시하고 마을 안팎을 오간다.

마을을 가른 펜스 너머엔 올리다만 철골 구조물이 우뚝 서있다. 임헌인(68)씨는 “저 솔고개 자리가 원래 총리(실 청사가) 오는 자리여”라고 했다. 원안대로 9부2처2청 등 36개 중앙행정기관이 이전할 경우 총리실이 들어설 곳이라는 얘기다. 2004년 수도 이전에 반대해 서울·과천으로 “만날 봉고차 전세 내 시위를 다녔다”는 그는 수정안에 찬성한다고 했다.

“원안이면 +α를 안 준다는 거 아녀? 반대할 적에도 내 땅에 손대기 싫어서 그랬는데, 이미 조상님들 산소도 다 이장했응께, 할람 하고 말람 말라고 혀어. 그래도 애들 먹고 살라면 울산 같은 도시가 낫지. 한다고 했음 해야지 왜 또 반대하고 난리여.”
그는 지방선거 민심에 대해서도 “민주당 바람이 불어 그랬는데, 도지사 잘못 뽑았다고 벌써 여론이 많다니께. (한나라당이 안 된 건 박해춘 후보가) 늦게 와서 그려”라고 했다.

임만수(64) 이장은 “여론조사를 하면 수용지 내에서도 견해가 다 다르지만 진의리 주민들은 원안 해선 얻을 게 없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정부 기관이 충청 와서 뭐 하느냐”는 거다. 그는 “주민을 생각한다면 수정을 하고 좋은 기업을 유치해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라며 “지방선거 결과도 정치 싸움이지 충청도민이 원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축사로 향하던 임재무(58)씨가 이 이야기를 듣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행정도시 온다니까 땅을 줬지, 공장 짓는다고 줬어?”

성옥기(62)씨는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그냥 살았음 좋겠다”고 했다. “젊어서는 그렇게 여기 떠나 사는 게 소원이었는데, 내가 친정이 대청댐이여. 그래서 봉께 일단 이사를 나가면 다시는 못 돌아가더라구….” 그는 차라리 “20년이구, 30년이구, 엎치락뒤치락해서 죽을 때까정 살았음 좋겠어”라고 했다.

아직 이주하지 않은 주민들은 보상금의 90%만 받은 상태다. 나머지 10%를 이사할 때 받는 대신 주택과 농지에 대한 임대료를 내지 않고 살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찬반 여부와 관계 없이 내 땅 내주고 남의 땅에서 농사 짓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논란도 탐탁지 않아 했다. 주민들은 “이사 나간 주민”이라는 기자의 표현을 “강제로 쫓겨 나간 거여”라고 바로잡았다. 또 “상주(喪主)는 가만 있는데, 왜 주변에서 난리여…억울한 건 우린디…”라는 말로 극한 대립의 한복판에서 지나온 9개월의 마음 고생을 대변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세종시 전쟁’
세종시 수정안은 국토해양위에서 부결됐지만 국회법 제87조에 따르면 상임위에서 부결된 의안도 의원 30명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땐 본회의로 갈 수 있다. 이 문제를 놓고 또 여야가 옥신각신하고 있다.

세종시 원안 추진을 촉구했던 충청권 자치단체장 당선자들은 국회 부결은 민심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취임을 닷새 앞둔 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자는 논평을 통해 “세종시 수정안 상임위 부결은 충남도민과 국민의 승리”라며 “본회의 회부 시도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밝혔다. 원안 시행 시 ‘+α’가 없어진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원안에 이미 대학이라거나 교육기관이나 기타 산업시설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서 “기존에 수도권 기업이 지방에 내려올 때 지원하는 기업이전 보조금 등 세제적 특혜를 활용해 충남이 기업 유치 활동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원안 추진을 주장하며 단식투쟁까지 했던 유한식 연기군수는 이번에 당선돼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주민들이 600년 삶의 터전을 내준 것은 국정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시가 흥정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닌 것이었다”며 “이런 측면에서 당초 취지대로 세종시가 진행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친이계는 본회의 부의를 위한 서명에 돌입했다. 이미 국회법을 충족하는 30명이 넘는 60여 명의 의원 서명을 확보했다고 한다. 이들은 28일 열리는 본회의에 부의 요구서를 내고 29일 표결에 부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표결에 들어간다 해도 세종시 수정안은 결국 부결될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당 친이계를 중심으로 한 수정안 지지 의원은 약 100명으로 재적 과반수(146명)에 못 미친다.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원안’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당초 이전계획을 발표했던 기업·대학·연구소를 유치하려는 자치단체장 간 경쟁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수정안과 함께 패키지로 추진됐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유치를 놓고도 충남은 물론 인천·광주·대구 등 지역 간 유치경쟁이 불붙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됐지만 ‘세종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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