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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대안 없다면 퇴로라도 열어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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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0일 국회에서 만난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연말에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4대 법안을 내년 2월 임시국회에서 논의하는 정도로 실리를 얻어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며 답답해했다. 13일째 계속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법사위 점거농성을 자아 비판한 말이다. 농성 의원들도 기진맥진해 있다. 그는 "여당이 우리의 '4대 법안은 합의처리해야 한다'는 요구를 죽어도 받을 수 없다는데 그렇다면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합리적으로 처리한다'고 조금 양보할 수 있지 않으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합의 처리'가 정 안 되면 '합리 처리'로 가자는 얘기였다.

한나라당의 다른 재선 의원은 "4대 법안 문제가 안 풀리면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이나 예산안까지 보이콧하겠다는 것이냐. 당 지도부의 생각을 모르겠다"고 지도부를 꼬집었다.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한나라당에서도 국회 상황에 염증을 내는 의원들이 많다. 물리력으로 회의장을 봉쇄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부담감을 토로하는 의원들이 한둘이 아니다. 한 일간지 조사에선 당 소속 의원 62%가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여당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지도부의 생각은 다르다. 박근혜 대표는 이날 여야 4자회담이라는 협상 테이블에 응하긴 했지만 "여당이 합의처리를 약속하지 않으면 소수당인 우리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지난 15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완고한 태도다.

견해를 쉽게 바꾸지 않는 것이 정치인의 덕목이긴 하다. 하지만 강약의 호흡조절과 냉정한 상황분석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인데 국회가 자기 존립의 가장 큰 근거인 예산안 처리도 못하는 지경이다. 여당이 4대 입법안을 연내에 단독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과대망상이고, 야당이 그렇게 믿는다면 피해망상이다. 여당도 스스로 단독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최소한의 명분을 유지해야 하는 내부 사정 때문에 박 대표의 합의처리 요구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실 한나라당이 요구하는 합의처리라는 건 여당 입장에선 '야당이 도장을 안 찍어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항복문서나 마찬가지다. 수용하기 힘든 카드다. 이미 한나라당은 4대 법안의 '연내 처리 불가'라는 실리를 얻은 상황이다. 이제 여당에 퇴로의 명분만 쥐여주면 국회는 정상화되고 그 공의 반 이상을 한나라당이 가질 수 있는 기회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가 정치를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는 지난 16대 국회에서 경험한 것으로 충분하다.

김정하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