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경매회사 크리스티 CEO 돌먼 “1위 비결? 뭐니뭐니 해도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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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과 11월 첫 두 주는 뉴욕 맨해튼의 ‘옥션 위크(Auction Week)’다. 세계 1~3위 경매회사 크리스티·소더비·필립스 드 퓨리가 모두 출전하는 세계 경매시장의 ‘빅 매치’가 벌어진다. 해마다 새로운 세계기록이 쏟아지는 산실이기도 하다. 올해 크리스티는 파블로 피카소를 앞세웠다. 2000년 크리스티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준 뒤 와신상담해온 소더비는 앤디 워홀로 맞섰다. 결과는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 그리고 흉상’을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640만 달러에 판 크리스티의 완승이었다. 불꽃 튀는 경매 전쟁의 현장에서 크리스티를 지휘한 에드워드 돌먼(50) 회장을 지난달 뉴욕 맨해튼 록펠러 센터 집무실에서 만났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 피카소 그림이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는데.

“경매의 승패는 걸작을 보유한 원매자를 누가 먼저 잡느냐에서 이미 갈린다. 우리는 진작에 로스앤젤레스의 부호 고(故) 시드니 브로디 부부와 『쥬라기 공원』 작가 고 마이클 크라이튼의 상속자들을 확보했다. 특히 브로디 부부의 컬렉션엔 피카소의 절정기인 1932년 작품 ‘누드, 녹색잎, 그리고 흉상’이 포함돼 있었다. 그동안 피카소 작품의 경매 가격 상승 추세를 감안하면 1억 달러는 넘을 거라 예상했다.”

● 피카소의 작품 ‘누드, 녹색 잎, 그리고 흉상’은 브로디 부부가 산 뒤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그게 가격에 영향을 줬나.

“물론이다. 시장은 참신한 것,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당연히 이 작품은 소장 가치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아무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크리스티가 경매한 물건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긴 게 많다. 타이타닉호의 구명조끼라든가 메릴린 먼로의 반지처럼….

“출처나 유래는 중요하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으면 가치가 올라간다. 피카소 작품이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도 비슷한 예다. 먼로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아마 캐럿당 단가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팝스타나 유명 연예인의 소장품을 가진 사람이 크리스티를 찾아오기도 한다. 어느 경매회사나 이런 물건을 서로 잡기 위해 경쟁한다.”

● 1999년 39세의 나이로 만년 2등이었던 크리스티의 CEO가 됐다. 그리고 1년 만에 크리스티를 정상에 올려놓은 뒤 10년 동안 수성(守城)했다. 비결이 뭔가.

“역시 사람이다. 경매회사는 독보적 기술도, 후발자가 따라잡기 힘들 만큼의 설비도 없다. ‘VIP 고객’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스페셜리스트(예술품 가격을 감정하고 거래를 알선하는 전문가)가 전 재산이나 다름없다. 스페셜리스트는 예술이 좋아 이 길을 택한 사람이다. 그들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 이게 CEO의 역할이다. 돈이나 명예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해주는 게 더 중요하다.”

● 고객과 관계를 어떻게 맺나.

“고객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확하고 믿을 만한 정보와 조언을 주는 것이다. 고객이 우리를 찾는 이유는 전문지식이 필요해서다. 작품을 가진 고객이 적정한 가격에 팔 수 있도록 도와줄 때도 가능한 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조언한다. 정직함과 성실함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다.”

● 다른 회사도 다 그렇게 하지 않겠나.

“스페셜리스트를 키우기 위해 회사 안에 미국·영국 대학이 인정하는 대학원 과정을 두고 있다. 인재는 밖에서 스카우트해 오기보다 안에서 키우려는 데 중점을 둔다. 우리 회사에 이직이 많지 않은 이유다. 특히 핵심 보직에 있는 인재는 이동이 거의 없었다. 핵심 고객을 맡고 있는 스페셜리스트는 15~25년씩 우리 회사에서 일해왔다. 전공이나 학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도 역사학도였다. 예술에 대한 열정만 있으면 족하다.”

● 잡역부에서 출발해 CEO까지 올랐는데.

“스페셜리스트 중에 매니저가 되기를 원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스페셜리스트는 계속 전문 분야에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전문 분야만 파면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다만 CEO는 예술시장 밖도 봐야 한다. 고객의 욕구가 뭔지, 시장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이런 걸 봐야 한다. 스페셜리스트 경험이 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들의 애로가 무엇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돌먼 회장은 24세에 크리스티 가구부문 잡역부로 직장 생활을 시작해 1년 만에 스페셜리스트로 올라선 뒤 95년 경영으로 진로를 바꿨다.)

● 럭비 선수를 꿈꿨는데 인생 항로를 바꾼 계기는.

“문득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면에서 예술과 스포츠가 통한다고 느꼈다. 운동 선수가 어느 순간 실력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을 때 느끼는 짜릿함은 예술가가 걸작을 이뤄냈을 때 맛보는 카타르시스와 비슷하다. 그래서 예술의 세계에 뛰어들어보고 싶었다.”

● 스포츠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스포츠에선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 팀원에게 동기 부여를 하고 이들이 뛰게 해야 한다. 우리 일이 딱 그렇다. 겉으로 봐선 매일 파티를 열고, 술 마시고, 잡담하는 것 같지만 속으론 극도로 긴장한다. 그 속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뛰어야 한다. 내가 스포츠에서 배운 게 그거다. 팀원이 긴장감 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동기 부여하고 함께 뛰는 거다. 경매회사 경영과 스포츠는 그런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 어떤 CEO는 팀플레이를 중시하고, 어떤 CEO는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한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양자가 조화로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스타를 장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타 플레이어가 팀에서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선수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팀. 이게 내가 원하는 모습이다. 팀이 먼저이고 다음이 스타다. 스타가 먼저고 팀이 나중이 될 순 없다. 물론 팀만 강조해 스타를 다 쫓아내는 것도 잘못이지만….”

● 크리스티는 한 해 450개 경매를 진행하고 분야도 80여 개로 나뉘어 있다. 최근 가장 뜨거운 시장은 어디인가.

“가장 각광받고 있는 분야는 역시 20세기 초반 미술품이다. 최근 6개월 사이 가장 빠르게 회복하고 있는 시장이다. 물론 비범한 걸작은 분야와 관계없이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다.”

● 다른 사업에도 진출이 활발한데.

“최고급 리조트나 고성(古城)을 중개하는 부동산회사, 자체 갤러리까지 갖고 있다. 2006년 도입한 온라인 경매는 크리스티 매출의 30%를 차지한다. 요즘엔 예술품 보험·파이낸스·보관 사업도 검토 중이다.”

● 한국 작품에 대한 생각은.

“최근 12~20개월 시장을 주도한 건 아시아다. 아시아에서 한국 컬렉터의 안목이 돋보인다. 특히 리움 미술관 컬렉션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전후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는 놀라울 정도다. 한국 현대미술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작품을 좋아한다.” 

에드워드 돌먼 회장은

1960년 영국 런던 출생
81년 영국 사우스햄튼대(역사학) 졸업
84년 크리스티 사우스켄싱턴 경매장의 가구 부문 잡역부로 입사
85년 스페셜리스트로 승진(유럽과 중국 고가구 담당)
95년 스페셜리스트에서 경영으로 진로 전환
99년 39세의 나이에 최고경영자(CEO)로 발탁 



1억640만 달러  올해 5월 미술품 경매 최고가 경신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 그리고 흉상’

예술품 넘어 사람 이야기까지 파는 경매

18세기 제임스 크리스티, 미술품 경매 시작

사연 담긴 ‘먼로의 케네디 드레스’ 값 100배로 뛰어

경매의 기원은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노예 매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근대적 경매는 소더비 창립자 새뮤얼 베이커가 1744년 도서관 고서를 처분한 게 효시(嚆矢)다. 베이커는 고서만 취급한 반면 경매의 꽃인 미술품 거래는 1766년 크리스티를 세운 제임스 크리스티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벤처기업에 불과했던 크리스티를 유럽 최대 경매회사로 키운 건 프랑스혁명이었다. 혁명정부가 귀족 계급으로부터 몰수한 보석과 예술품을 주로 영국 크리스티를 통해 처분했기 때문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크리스티는 세계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큰손으로 부상했다. 1973년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가 99년 구찌·이브 생 로랑을 소유한 프랑스 부호 프랑수아 피노가 지분 100%를 사들여 개인기업이 됐다.

오늘날 크리스티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 32개국에 57개 사무소를 두고 있다. 런던·뉴욕·홍콩을 포함해 세계 10개 도시에 경매장을 운영 중이다. 미술품은 물론 와인·보석·사진·장신구를 포함해 80개 분야에서 매년 450건의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크리스티에서 경매되는 물건은 200달러짜리부터 1억 달러가 넘는 초고가 미술품까지 다양하다.

메릴린 먼로의 케네디 드레스
세계 최대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작품만 파는 게 아니다. 이야기도 판다. 고미술부터 자
동차·인형, 심지어 타이타닉호의 구명조끼까지 크리스티가 취급하는 경매물품에는 숱한 사연이 담겨 있다. 빌 게이츠 등 재계 인사와 할리우드 스타를 고객으로 두고도 각종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1999년 10월 뉴욕에서 메릴린 먼로가 소장했던 물건(576점)의 경매 행사가 열렸다. 먼로가 ‘메이저리그 강타자’ 조 디마지오로부터 받은 결혼 반지는 불과
3000달러짜리였지만 세기의 섹시 스타가 최고의 선수에게 받은 반지였다는 이유 하나 때문
에 77만 달러에 낙찰됐다. 또 모조 다이아몬드 6000여 개가 박힌 하얀 이브닝드레스는 예상
낙찰가인 1만5000달러를 훌쩍 넘어 100배가 넘는 126만 달러에 팔렸다. 이 드레스가 이렇게 비싸게 팔린 이유도 사연 때문이다. 먼로는 1962년 존 F 케네디대통령의 생일 축하연에서 이 드레스를 입었다. 케네디 대통령과 먼로가 서로 사랑하는사이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둘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크리스티는 경매를 진행할 때 먼로가이 드레스를 입고 케네디를 향해 ‘HappyBirthday Mr. President’를 노래하는 장면을 사진과 함께 도록에 자세히 소개했다. 2007년 63억 달러로 사상 최대 매출을 올렸으나 금융위기로 지난해 매출은 33억 달러로줄었다.



j 칵테일 >> 경매 원동력은 ‘3D(죽음·빚·이혼)’

에드워드 돌먼 크리스티 회장은 경매를 일으키는 3대 요인을 죽음(Death), 빚(Debt), 이혼(Divorce)이라고 했다. 아무리 꼭꼭 숨은 보물이나 예술품도 결국은 3D 때문에 시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작품 소장자가 세상을 떠나면 상속자는 이 작품을 팔아서 현금을 보유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대형 경매는 죽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지난달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피카소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피카소의 네 번째 연인이었던 마리 테레즈 월터를 그린 이 작품은 피카소가 생전에 애지중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자신의 집 창고에 보관했다.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사업가 시드니 브로디 부부가 피카소로부터 직접 사들인 뒤에도 ‘누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61년 피카소의 80회 생일을 기념한 전시회에 딱 한 번 등장했을 뿐이다. 그러다 브로디 부부가 타계하자 시장에 나왔다. 이브 생 로랑 소장품도 마찬가지였다.

빚도 경매를 활성화하는 요인이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나게 마련이고 이들이 보유한 소장품을 경매에 내놓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빚으로 인해 시장에 나온 작품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혼이 늘면 경매도 는다. 부부가 이혼하면 작품을 반씩 나눠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이를 현금화하기 위해 경매에 내놓는다.



j 칵테일 >> 피카소의 ‘꿈’ 최고가 경신 할까

피카소의 ‘누드’ 기록을 깰 후보는 피카소의 ‘꿈’이 꼽히고 있다. 역시 마리 테레즈를 그린 이 작품은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미라지 호텔 주인 스티비 윈이 소장하고 있다. 애초 윈은 헤지펀드 매니저 스티브 코언에게 1억3900만 달러를 받고 이 그림을 팔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에게 그림을 설명하다 팔꿈치로 그림에 구멍을 내는 바람에 거래가 깨졌다. 윈은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수선료를 받아 그림을 수리한 뒤 소장하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1억 달러가 넘는 피카소 그림이 걸려 있지만 박물관 소장품은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2008년 타계한 프랑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컬렉션은 개인 유품 경매로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2월 이뤄진 로랑의 컬렉션 경매 대금은 4억8400만 달러에 달했다. 100만 달러가 넘는 품목만 61개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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