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右'는 있어도 '左'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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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좌·우,진보·보수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사회철학을 전공한 탓에 최근 기자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정치적 용어란 언제나 현실의 맥락과 얽혀있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당들이 정책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념논쟁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런 논리 뒤에 숨어 색깔론을 펴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고, 그런 의도는 개념적 모호성 속에 숨게 마련이다.

모호한 개념으로 정치적 의도를 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 개념에 대한 잠정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원로·중진·소장 등 많은 관련 학자들을 괴롭혀 '합의 아닌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진부한 얘기지만, '좌·우'의 기원은 프랑스 혁명(1789년)이후 의회의 자리 배치에서 유래했다. 앙시앵 레짐의 붕괴로 공화정이 들어서고 혁명을 주도했던 자코뱅당이 국왕의 처형, 민중운동과의 관계 등을 놓고 나뉘어 의장을 중심으로 좌(산악파)·우(지롱드)에 자리잡으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용어가 관행화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880년대 프랑스 노동당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자본주의·사회주의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좌·우'는 사회 전반을 규정하는 두려운 힘을 갖게 된다. 그 태생과 무관하게 자본주의·사회주의의 대립이 구체적인 정치세력으로 존립했던 냉전시대에 의미 있는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이 용어를 '냉전의 아들'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체제대립에 기초한 정치적 실체가 있다는 가정 하에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은 물론 건국 당시 한국의 이념분열을 좌·우로 구분할 수 있었던 것도 체제 대립을 기반으로 한는 명백한 정치적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진보·보수는 이런 정치적 실체와 무관하게 변화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나뉘는 철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좌=진보, 우=보수'라는 등식이 언제나 성립되는 것은 아니며, 탈냉전 이후에 더욱 그렇다. 소련연방을 붕괴시킨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는 진보적이었지만 좌는 아니었다. 탈냉전 이후 우리 사회에 등장한 환경·여성·시민·지역·문화·통일운동도 진보적일지언정 좌파로 규정하지 않는다.

거꾸로 유럽의 전통적 사회주의 분파의 경우 좌파일 수는 있어도 진보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에서 주장한 것처럼 좌파도 보수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진보·보수는 변화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인 셈이다.

학계에선 '좌'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전통적 체제 대립에 기초한 정치세력이 사실상 소멸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념적 차이도 시장과 민주주의 내에서 공존 가능한 다양성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는 있어도 '좌'는 없다고 하기도 한다.

문제는 문화적 개방성과 상상력이다. 변화의 요구를 배제하고 자신의 상상력 부재를 은폐하기 위해 동원하는 냉전시대의 유물은 이제 그다지 효험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변화에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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