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사나이’의 주인공 주영수는 한 인간이 겪기엔 너무 심한 일들을 연거푸 겪는다. 어린 딸이 유괴된 후 사이가 벌어진 아내(박주미)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목사였다 신을 버린 그는 하던 사업마저 부도 위기에 몰린다. 그런데 8년 만에 유괴범 병철(엄기준)로부터 연락이 온다. 극한의 선택 끝에 사투를 벌이며 아이를 찾지만 아이는 이미 망가진 상태다. 그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교도소로 들어간다. 제목처럼 철저히 파괴된 인생이다.
-지난번 영화 ‘리턴’도 그랬고 또 스릴러다. 센 이야기에 끌리는가 보다.
“굴곡이 좀 심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팔을 쫙 벌려 보이며) 여기부터 여기까지 감정 폭을 죄다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재미있다. 요즘 기획되는 한국영화에 스릴러가 많은 것도 이유다.”
-작품마다 후유증이 심하다고 들었다. 배역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는.
“촬영 끝난 지 석 달쯤 됐으니 지금은 괜찮다. 하지만 아직도 주영수 그 친구가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것 같다.”
-늘 따라다니는 단어가 ‘메소드 연기’다. 역할에 배우를 맞추는 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방법은 없다. 그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 하물며 영수의 경우는 8년의 세월을 느끼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공책에 수시로 영수의 상황과 심리를 적어 내려갔다. 관객이 한순간, 눈빛 한 번으로도 영수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난 내가 그 인물을 모르면 절대로 연기할 수가 없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할 때는 김훈의 『칼의 노래』를 끼고 살았다. 이순신 장군의 심리가 디테일하게 들어 있었으니까.”
-PC방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에서 내용처럼 사흘을 샜다고 들었다.
“밤샌 사람 연기,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겉으로만 하는 ‘스킬(기술)’에 불과하다. 영수가 밤을 새는 동안 사이코패스 유괴범한테 가졌을 증오와 분노, 다시는 딸을 잃지 않겠다는 절박함을 내가 밥 잘 먹고 잠 잘 자면서 표현할 수 있을까.”
-진짜로 하고 안 하고는 어떤 대목에서 가장 티가 난다고 생각하나.
“눈빛. 눈은 자기 맘대로 못한다. 흔히 눈물 흘리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연기를 할 때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면서 하는 배우들이 있다. 제일 안 좋은 방법이다. 가령 눈물 흘릴 때 어머니를 떠올린다면 눈물은 쉽게 나올 지 모르지만 어느 경우, 어느 배역에나 똑같은 빛깔과 질감의 눈물 연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강마에(‘베토벤 바이러스’)나 백종우(‘내 사랑 내 곁에’), 주영수가 소리 지르는 게 다 달라야 한다.”
“그 장면, 내가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만 해도 없었다. 교도소 면회 장면은 있었지만 결말이 달랐다. 대본을 읽으면서 혜린이의 생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딸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영수의 입장은 어떨까 싶기도 했고. 감독님한테 첫 미팅 때 말씀 드렸더니 너무 좋다고 대본을 고치셨다.”
-아이의 물음에 아버지는 거짓말을 한다.
“영수는 아이가 부모를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널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아닐까. 그 말에 웃는 아이의 모습은 8년간 지옥에서 살았던 남자에겐 치유가 됐을 거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을 성 싶은 장면이다.
“사실 어느 장면 하나 꼽을 수 없이 다 힘들었다. 한 인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창조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이니까.”
-다시 묻는다. 꼭 그렇게 힘들게 해야 하나.
“대학(서울예대 연극과)때 교수님이 그러셨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고. 배우는 나 자신이 아니다. 배우는 물병이 돼라면 물병이, 노트북이 돼라면 노트북이 돼야 한다. 아까 메소드 연기를 얘기했지만 연기에 메소드 연기 말고 다른 게 뭐가 있을까. 그래서 촬영 중엔 아무도 안 만난다. 내 몸 안에 풍선이 하나 있고, 여기에 그 캐릭터의 공기가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거다. 일상생활을 할 때마다 공기는 조금씩 새나간다. 지난해 ‘내 사랑 내 곁에’ 땐 아버지 칠순 잔치도 못 갔다.”
‘파괴된 사나이’의 제작진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영화 속 영수는 세 번 바뀐다. 성령의 강림을 부르짖는 목사였다 세상의 때가 묻는 사장으로, 그러다 유괴범을 뒤쫓는 필사적인 아버지로. 그런데 그때마다 촬영장에서 만나는 김명민의 느낌이 달라졌다는 거다. 설정에 따라 현실 속에서도 조금씩 바뀌는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약간 오싹했다는 얘기다. 탈아(脫我)의 경지다.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웃음) 쇼퍼홀릭 예를 들어보자. 쇼윈도에서 멋진 구두를 봤다. 집에 와서도 그 구두 생각만 난다. 누가 사갔으면 어쩌지, 걱정도 되고. 배우도 비슷하다. 계속 배역 생각만 난다. 제일 중요한 일차 관객은 스태프다. 그들이 날 그 인물로 안 봐준다면 어떻게 스크린 너머로 감정을 전달하겠나.”
글=기선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