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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김명민, 타협 없는 연기 결벽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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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김명민(38). 연기에 관한 한 그는 ‘지하드(聖戰)’를 부르짖는 알카에다 못잖은 원리주의자다. 그만큼 리얼리티에 엄격한, ‘순도 100%’ 지향이란 얘기다. 지난해 박진표 감독의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병 환자 역을 연기하기 위해 촬영 진행과 함께 20㎏을 뺀 그다. 센세이션을 일으켜보겠다는 얄팍함의 발로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살이 빠지는 루게릭병 환자를 표현해내는 데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어서였다. “연기는 어차피 거짓말이다. 거짓말의 비율을 최소화하는 게 배우의 일이다.” 연기에 대한 그의 결벽증적인 완벽주의 덕에 우리는 지금껏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하얀 거탑’의 장준혁을 보며 행복할 수 있었다. 18일 영화 ‘파괴된 사나이’(7월 1일 개봉)를 계기로 만난 인터뷰에서 그는 연기에 대해 “판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캐릭터가) 아픈 구석이 있으면 더 아프게 파고, 기쁜 구석이 있으면 더 기쁘게 파고 싶다.” 아마도 그에게 연기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실의 내면에 닿게 파야 하는 거대한 구덩이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이지만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싶다”는 그의 절실한 욕구는 이번엔 유괴로 딸을 잃은 후 8년의 지옥 같은 시간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된 목사 주영수를 통해 발현된다.

‘파괴된 사나이’의 주인공 주영수는 한 인간이 겪기엔 너무 심한 일들을 연거푸 겪는다. 어린 딸이 유괴된 후 사이가 벌어진 아내(박주미)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목사였다 신을 버린 그는 하던 사업마저 부도 위기에 몰린다. 그런데 8년 만에 유괴범 병철(엄기준)로부터 연락이 온다. 극한의 선택 끝에 사투를 벌이며 아이를 찾지만 아이는 이미 망가진 상태다. 그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교도소로 들어간다. 제목처럼 철저히 파괴된 인생이다.

“이 세상에 주영수만큼의 괴로움을 가진 사람이 과연 없을까. 평범한 삶은 없다. 우리 모두의 삶은 다 나름대로 기구하다. 굴곡의 정도만 다를 뿐이다. 유괴라는 소재보다 한 남자가 철저히 파멸돼가는 과정에 끌렸다.”

-지난번 영화 ‘리턴’도 그랬고 또 스릴러다. 센 이야기에 끌리는가 보다.

“굴곡이 좀 심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팔을 쫙 벌려 보이며) 여기부터 여기까지 감정 폭을 죄다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재미있다. 요즘 기획되는 한국영화에 스릴러가 많은 것도 이유다.”

-작품마다 후유증이 심하다고 들었다. 배역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는.

“촬영 끝난 지 석 달쯤 됐으니 지금은 괜찮다. 하지만 아직도 주영수 그 친구가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것 같다.”

-늘 따라다니는 단어가 ‘메소드 연기’다. 역할에 배우를 맞추는 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방법은 없다. 그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 하물며 영수의 경우는 8년의 세월을 느끼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공책에 수시로 영수의 상황과 심리를 적어 내려갔다. 관객이 한순간, 눈빛 한 번으로도 영수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난 내가 그 인물을 모르면 절대로 연기할 수가 없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할 때는 김훈의 『칼의 노래』를 끼고 살았다. 이순신 장군의 심리가 디테일하게 들어 있었으니까.”

-PC방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에서 내용처럼 사흘을 샜다고 들었다.

“밤샌 사람 연기,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겉으로만 하는 ‘스킬(기술)’에 불과하다. 영수가 밤을 새는 동안 사이코패스 유괴범한테 가졌을 증오와 분노, 다시는 딸을 잃지 않겠다는 절박함을 내가 밥 잘 먹고 잠 잘 자면서 표현할 수 있을까.”

-진짜로 하고 안 하고는 어떤 대목에서 가장 티가 난다고 생각하나.

“눈빛. 눈은 자기 맘대로 못한다. 흔히 눈물 흘리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연기를 할 때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면서 하는 배우들이 있다. 제일 안 좋은 방법이다. 가령 눈물 흘릴 때 어머니를 떠올린다면 눈물은 쉽게 나올 지 모르지만 어느 경우, 어느 배역에나 똑같은 빛깔과 질감의 눈물 연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강마에(‘베토벤 바이러스’)나 백종우(‘내 사랑 내 곁에’), 주영수가 소리 지르는 게 다 달라야 한다.”

-신의 존재를 강하게 회의하던 영수가 결국 희망을 찾는다. “나 한번도 잊은 적 없었느냐”는 딸 혜린의 질문은 영수의 전직이 목사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상당히 종교적으로도 들린다.

“그 장면, 내가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만 해도 없었다. 교도소 면회 장면은 있었지만 결말이 달랐다. 대본을 읽으면서 혜린이의 생각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딸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영수의 입장은 어떨까 싶기도 했고. 감독님한테 첫 미팅 때 말씀 드렸더니 너무 좋다고 대본을 고치셨다.”

-아이의 물음에 아버지는 거짓말을 한다.

“영수는 아이가 부모를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널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아닐까. 그 말에 웃는 아이의 모습은 8년간 지옥에서 살았던 남자에겐 치유가 됐을 거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을 성 싶은 장면이다.

“사실 어느 장면 하나 꼽을 수 없이 다 힘들었다. 한 인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창조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이니까.”

-다시 묻는다. 꼭 그렇게 힘들게 해야 하나.

“대학(서울예대 연극과)때 교수님이 그러셨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고. 배우는 나 자신이 아니다. 배우는 물병이 돼라면 물병이, 노트북이 돼라면 노트북이 돼야 한다. 아까 메소드 연기를 얘기했지만 연기에 메소드 연기 말고 다른 게 뭐가 있을까. 그래서 촬영 중엔 아무도 안 만난다. 내 몸 안에 풍선이 하나 있고, 여기에 그 캐릭터의 공기가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거다. 일상생활을 할 때마다 공기는 조금씩 새나간다. 지난해 ‘내 사랑 내 곁에’ 땐 아버지 칠순 잔치도 못 갔다.”

‘파괴된 사나이’의 제작진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영화 속 영수는 세 번 바뀐다. 성령의 강림을 부르짖는 목사였다 세상의 때가 묻는 사장으로, 그러다 유괴범을 뒤쫓는 필사적인 아버지로. 그런데 그때마다 촬영장에서 만나는 김명민의 느낌이 달라졌다는 거다. 설정에 따라 현실 속에서도 조금씩 바뀌는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약간 오싹했다는 얘기다. 탈아(脫我)의 경지다.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웃음) 쇼퍼홀릭 예를 들어보자. 쇼윈도에서 멋진 구두를 봤다. 집에 와서도 그 구두 생각만 난다. 누가 사갔으면 어쩌지, 걱정도 되고. 배우도 비슷하다. 계속 배역 생각만 난다. 제일 중요한 일차 관객은 스태프다. 그들이 날 그 인물로 안 봐준다면 어떻게 스크린 너머로 감정을 전달하겠나.”

글=기선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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