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던지는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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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대의 민주 국가는 대통령의 임기를 단임이나 중임으로 제한한다. 장기 집권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다시는 대통령을 못하게 한다면, 그것도 공정한 처사는 아닐지 모른다. 그가 아주 유능한 인물일 경우에는 그런 공민권 제한(?)이 국가적 손실로 나타난다. 독재는 막되 능력은 살리는 무슨 묘안이 없을까?

베네수엘라의 민중주의

베네수엘라 헌법이 이런 고민을 풀어준다. 대통령 퇴임 뒤 10년이 지나면 재출마 권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법이 그렇다는 것이지 전임 대통령의 치적을 10년이나 고이 기억했다가 그에게 투표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랴? 이런 우리네 선입견과 달리 근래에도 그런 대통령이 둘이나 있었다. 1988년 선거에서 카를로스 페레스는 10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았고, 93년 선거에서 라파엘 칼데라는 25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올랐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지 못해 원통할 사람이 우리 사회에도 한둘이 아니겠으나, 그들의 컴백은 완전히 스타일을 구겼다. 페레스는 공금 유용으로 탄핵되고, 칼데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지원을 구걸했기 때문이다. 쇠가죽처럼 질긴 재집권 야심 못지 않게 유권자의 인심도 별난 것이 사실이다. 그 질기고 별난 취미들을 이어주는 고리가 '인기'라는 화상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객의 선동과 유권자의 열광이 한판 어우러진 부흥회가 바로 민중주의(populism)이다.

인기가 허기를 면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민중주의는 제법 과격한 개혁을 약속하게 마련이다. 개혁 대상은 가진 자들(haves)이고, 개혁의 레토릭이 강할수록 그 반대편(have-nots)의 박수가 클 것은 정한 이치다. 개혁이 가진 자의 몫만 나누려고 하다가는 엄청난 반발과 한계에 부닥친다. 베네수엘라는 매장량 세계 6위, 수출액 세계 4위의 석유라는 천혜의 선물이 있었다. 주변 국가들에 비해 민중주의 성공의 물적 기반이 그만큼 두터웠으나 결과는 엉망이었다. 국내총생산의 20%, 정부 예산의 50%에 이르는-지난 20년간 누계로 3천억달러가 넘는-석유 수출 대전(petro-dollar)이 인기 위주의 '과시 효과' 사업에 탕진되고, 이 과정에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물보다 기름이 흔할 이 나라가 80년대 들어 유가의 지속적 인상, 자동차 최고속도 80㎞ 제한, 주유소 영업시간 단축, 승용차 7부제 시행 등의 '유류 긴축' 조치를 취했으니 그야말로 코미디 소재가 아닌가?

지난 12일 군부의 강요로 퇴진했다가 51시간 뒤에 복귀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 역시 민중주의 신앙의 열렬한 전도사다. 경제 실정(失政)에 항의하는 가두 시위와 그에 대한 총격으로 최소한 16명이 죽고 3백명이 다치는 참변 속에서도 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장밋빛 장광설을 두시간이나 토했다. 92년 차베스 공수단 중령은 페레스 정권을 전복하려다 실패한다. 그는 실패한 쿠데타와 2년 복역을 개혁의 상징으로 내세워 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승을 거둔다. 민중주의의 말로가 대개 그러하듯 그도 여기서 자만한 듯하다. 일례로 "나의 반대파가 보지 못한 것은…우고 차베스가 그냥 차베스가 아니라 베네수엘라 민중이란 사실"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정치 외압에서 벗어나려는 국영 석유회사(PdVSA)를 "위스키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호화 별장"이라고 몰아치며 낙하산 인사를 강행했다. 인구의 96%가 가톨릭인 나라에서 성직자들에 대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퍼부었으니 이승은 물론 저승에서도 왕따를 면하기 어렵게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이고, 정말로 중죄가 있다. 하필이면 쿠바의 카스트로,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이란의 하타미 등 '악의 싹들'을 골라가며 친구로 사귀었기 때문이다. 9·11 테러의 복수에 대해서도 "테러를 통한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비꼬면서 미국의 심사를 건드렸다.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다.

쿠데타 배후에 미국이?

민중을 지지파와 반대파로 가르고, 노조마저 적으로 돌린 차베스의 극단적 민중주의는 역공을 불렀다. 사흘 천하 쿠데타 배후에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가 있었다는 소문이 소문 아닌 사실로 굳어지는 듯하다. 지난 2월 21일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리처드 래퍼는 자유주의 개혁의 실패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은 과거의 민중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한다고 관찰했다. 신자유주의에 좌절하고 민중주의도 대안이 아니라는 그들의 고민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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