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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이념논쟁 이렇게 본다 -학계 30여명 긴급 전화 인터뷰 : "색깔은 빼고 정책 논쟁 해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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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정치권이 이념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학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고 있다. 이번 논쟁은 특정 이념에 대한 선호 여부를 떠나 한국사회 전반에 대한 평가 등 다양한 수준의 이론적 쟁점을 제기해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관련학자 30여명을 전화로 인터뷰 해 현재 제기되고 있는 쟁점과 그 타당성, 전망을 짚어봤다.

편집자

◇이념논쟁 해야 하나

현안이 되고 있는 1차적인 쟁점은 이념논쟁을 해야 하느냐의 여부다. 대체적으로 이념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수준의 논쟁은 필요하다는 견해로 모아졌다. 김석준(이화여대·정치학)교수는 "후보의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사상·가치를 검증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정당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강원택(숭실대·정치학)교수는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실질적 선택이 가능한 정책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념논쟁은 불가피하며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물론 이들도 '색깔론'을 우려한다.김병국(고려대·정치학)교수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책의 밑바닥에 있는 철학·이념의 차이를 고민토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전제하면서도 "편견에 기초한 이념 논쟁이 아니라 국민에게 이념적 선택의 폭을 넓혀줘 고민케 하는 이념의 경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론도 적지 않다. 신복룡(건국대·정치학)교수는 "이념논쟁을 지금과 같은 천박한 수준의 흠집 내기에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김호기(연세대·사회학)교수도 "한국의 시민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념논쟁은 시기상조다"라고 주장한다. 구범모(경남대·정치학)명예교수는 "탈냉전 시대에 지금과 같은 이념논쟁이 꼭 필요한지 의문"이라며 다른 맥락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이념적 불균형인가

이런 시기상조론에는 한국사회의 이념적 불균형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 손호철(서강대·정치학)교수는 이념논쟁을 '양날의 칼'로 비유하며 색깔논쟁이 아닌 정책논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박순성(동국대·경제학)교수는 "이념논쟁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냉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전제하고 "보수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념지형 때문에 불공정 게임이 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반면 그것조차 냉전적 사고라는 지적도 있다. 김일영(성균관대·정치학)교수를 비롯해 이념논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념논쟁에서 진보가 피해를 보는 불균형은 이해가 되지만, 이제는 당당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한 학자는 "색깔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냉전적 사고"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진보·보수의 실체는 있는가

그러면 진보·보수가 양립할 사회적 기반은 과연 있는가. 장달중(서울대·정치학)교수는 "나같은 보수주의자도 중도좌파로 취급될 정도로 사회적 스펙트럼이 좁다"고 전제하면서도 "20,30,40대의 정치적 성장으로 좋든 싫든 진보·보수가 나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양승목(서울대·언론학)교수는 "이번 논쟁은 진보세력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며 "수년내 정치권도 지역정당에서 이념정당으로 재편될 것"으로 예측하고 "여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지역갈등 이상으로 힘든 장벽을 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사회의 중요현안인 집값 문제, 발전노조 문제, 그리고 세계적 이슈인 중동사태 등 구체적인 문제보다 추상적인 색깔논쟁이 먹혀드는 풍토가 '넘어야 할 산'이라는 것이다.

반면 이념논쟁을 우려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아직 그 기반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런 주장을 나은영(서강대·사회조사)교수는 '다원적 무지현상(pluralistic ignorance)'으로 설명하면서 "실제로 우리 사회가 진보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집단적 편견이 있다"는 것이다.

◇세대차인가, 이념차인가

그럼에도 본격적인 이념의 차이보다는 세대간의 문화적 차이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나은영 교수는 "경제적으로나 생활상으로 젊은층이 개방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이번 이념논쟁에는 사실 세대차가 깊게 깔려 있다"고 강조한다. 강원택 교수도 "예전 세대와 달리 미국과 냉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세대들에겐 이념이 주는 중압감이 크지 않아 세대차이가 이념의 차이와 중첩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같은 맥락에서 김병국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끼어있는' 세대인 40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강정인(서강대·정치학)교수는 "세대간의 차이가 깊숙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의 이념논쟁이라 할 수 없다"고까지 설명한다.

◇과연 이념의 차이가 있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번 논쟁이 해방 이후 억눌려 왔던 변화에 대한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 내에서 약간의 차이를 따지는 것일 뿐 예전의 이념논쟁과 같을 순 없다고 본다. 김병국 교수는 지금의 논쟁을 "자본주의 이념틀 속의 차이일 뿐 좌우 개념으로 말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김일영 교수도 "한국에는 사실상 급진좌파가 없으며 시장경제 내에서의 논쟁이기 때문에 색깔논쟁으로 끌고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석준 교수는 "얼마나 큰 잣대로 보느냐에 따라 이념의 차이가 다르다"고 분석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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