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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2> 제101화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⑪ 미국서 홍보 활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0·11·14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광씨는 수원농림중학교 3년 선배이다. 그러나 학교 다닐 적에는 그를 알지 못했다. 김씨의 요청으로 1973년 9월께 만난 뒤로 우리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를 통해 내가 중앙정보부의 조사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씨가 중앙정보부 조정과장으로 일하던 1973년 7월께였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이 서류봉투를 하나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세아 방송 사장인 김장환목사가 미국 부인을 데리고 사는데 정체가 모호하다고 하니 한번 조사해 보시오."

타자기로 깔끔하게 친 투서였으나 보낸 사람의 이름은 지워진 상태였다. 주된 내용은 내가 미국 스파이이며 한국의 정치·경제·군사에 관한 정보와 대통령의 지지도 등을 정기적으로 조사하여 미국에 보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내가 오산 비행장을 통해 미 공군기로 미국을 마음대로 오간다고까지 적혀 있어 아주 그럴 듯했다.

김과장은 투서만 믿고 목사이면서 방송사 사장인 나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어서 하부기관에 의뢰하여 은밀히 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것도 두번이나…. 그래도 내가 오산 비행장을 통해 미국을 오간 흔적이나 미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증거를 찾지 못하자 박대통령에게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1차와 2차 내사한 결과 김장환 목사는 매우 애국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미국에서는 침례교의 영향력이 크다. 김장환 목사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인맥이 매우 넓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도 가까운 김 목사를 국가 홍보에 활용하는 게 좋겠다."

그러나 나는 나라에서 따로 부탁을 하지 않아도 여러 사람과 함께 자발적으로 미국으로 날아가 한국을 홍보하고 다녔다. 그 많은 활동 중에서도 1975년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했을 때가 가장 극적이었다. 당시 도널드 프레이저 하면 반한파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인권이 없는 한국을 도와줘서는 안된다며 반한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그해 8월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김익준 의원과 함께 그의 출신지역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를 찾았다.

그 지역의 YFC(10대 선교회) 총재인 위플이 기독교 지도자 1백여명을 모아주어 우리는 그들에게 프레이저 의원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 모임에 참석한 미네소타 주립대학 신문의 편집인 조 스커트는 대학신문에 프레이저 하원의원의 무책임한 반한론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겠다고 약속했다.

1976년에는 미국의 극동방송 본사가 미국 내 반한여론을 바꾸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로버트 보먼 총재가 선두에 섰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프레이저의원의 안건은 의회에서 부결되었으며 프레이저 의원은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우리를 도왔던 미국의 기독교 인사들은 프레이저안이 부결된 날을 한국의 국경일로 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가 1975년에 미국에 갈 때부터 중앙정보부에서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겨주었지만 국가에서 경비를 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해외를 드나드는 데 필요한 비용은 주로 김인득 회장과 김연준 한양대 이사장, 유상근 명지대 총장 등이 부담했다.

김인득 회장의 평전 『8만 달러의 우표값 13만 통의 편지』에 보면 그가 미국의 반한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1975년부터 3년동안 미국을 오가느라 사용한 돈이 2백만달러를 넘는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이 다녀간 지 4개월 여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1981년 2월 3일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의 공동성명에 의해 백지화되었다. 주한미군 철수가 거론된 지 10년 만에야 마무리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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