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논쟁 이렇게 본다 <中> 정책 경쟁 벌일 好機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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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민주당의 경선과 함께 뜻밖에 정치 이념을 둘러싼 논란이 분분하다. 이념 논쟁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 이념만이 정치적으로 대표됐기 때문에 이번 논쟁은 결국 진보세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적으로 퇴조해가는 이념 논쟁이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면서 의아해 하기도 하고, 또 일부에서는 이념 논쟁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인식의 差는 엄연한 현실

이념 논쟁에 대해 일부에서 이처럼 거부감을 갖는 것은 아마도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이념논쟁이 남긴 부정적인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해방 이후 나타난 정치적 혼란이나 한국전쟁의 경험, 그리고 그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의 반공 이데올로기 등이 모두 이러한 부정적인 기억의 예가 될 것이다.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빨갱이'의 등식이 성립됐고, 이념을 둘러싼 논의는 금기시돼 왔다. 사실 나 역시 그런 부정적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보혁'대신 '보수·진보'라는 용어만을 고집한다. 혁신이라는 단어가 줄 수도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실 한 사회 내에 이념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모두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념의 차이는 감추려 한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인식의 차이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전 중앙일보가 실시한 이념 성향 조사에서도 일반 국민뿐 아니라 국회의원 사이에서도 그러한 시각의 차이가 존재하고, 더욱이 정당간 이념의 차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 한 정당이 갖는 이념이 다르면 추구하는 정책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당의 정책은 그 정당이 대표하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선거가 정책대결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은 정당의 경쟁이 이념에 기초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각 정당이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경우에만 정책에 기초한 정당 경쟁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처럼 이념에 따른 정당간 차이가 생겨나면 그때서야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보수 정치세력에 의해 통치돼 왔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가 진정으로 대변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은 많은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고 나라마다 그 특성도 조금씩 다르다. 보수·진보의 이념적 차이가 경제적 가치의 분배를 둘러싸고 생겨날 수도 있지만 종교·전통·윤리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둘러싸고 중요한 인식의 차이가 생겨날 수도 있다. 한때 진보적이었던 이념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보수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두려워 말고 적극 수용을

따라서 보수와 진보의 경쟁을 이미 '철지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로 단순화하려 한다거나 냉전시대의 공포감을 동원해 보수세력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것은 변화된 이 시대에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보수주의가 보다 건강해지기 위해서도 진보세력과의 균형 있는 경쟁이 오히려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진보 세력 역시 현 질서에 대한 비판의 제기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수용할 만한 이념적 정체성을 찾고 그에 따른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갈라놓았던 지역주의가 퇴행적이고 분열적인 것이었다면 이념 논쟁은 보편적 가치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둘러싼 논의라는 점에서 오히려 건전한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념 논쟁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이념에 기초한 정책경쟁이 지역주의를 대신해 우리 정치의 새로운 경쟁의 축으로 자리잡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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