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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우릴 때 넣어주면 차향 좋아져...생선조림·갈비찜과도 찰떡궁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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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호 09면

매화 필 적에 가슴이 아프고 속상하더니, 매실의 계절에 또 속이 상한다. 올봄에 이천 시골집을 팔고 서울로 이사를 온 후 몇 달 동안 잘 적응을 한다 싶다가도, 텔레비전과 시장에서 이런 것들을 볼 때 갑자기 그 시골집 생각이 나는 것이다. 우리, 아니 이제 남의 것이 된 매화나무에도 매실이 주렁주렁 달렸을 터인데.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14> 매실청 먹고 남은 매실은

지난주까지 시장에 매실이 한창이더니 약간 주춤한 듯하다. 몇 주 전 시장에 많이 출하되는 매실은 남부지방의 매실이니, 이제야 서울과 경기 지방의 매화나무에는 진한 연둣빛 매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을 게다. 그것을 나무에서 똑 딸 때의 그 상쾌함이란! 시장에 나와 약간 마른 듯한 느낌이 전혀 없이, 나무에 달려 물기를 한껏 먹은 탱탱한 육질이 너무도 싱그럽다.

시장에 진연둣빛 매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색깔에 혹하여 시장에서 매실을 또 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습관이란 건 무서운 일이더군’이라고 시작하는, 롤러코스터의 ‘습관’이란 노래의 가사가 딱 맞다. 해마다 이런 걸 담그고 사니 올해도 이걸 안 하면 뭔지 허전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지난해에 담근 매실청이 남아있는데 또 담가 무엇 하겠는가. 괜히 욕심이고 습관일 뿐이다. 노래 가사에서는 헤어진 애인 사진을 보며 ‘사랑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자신의 습관을 노래하는데, 시장에서 싱싱한 매실을 보니 헤어진 애인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듯하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이 계절에 매실을 사는 사람의 대부분은 매실주를 담그기 위해서였다. 매실이나 모과 같은 과일은, 과육에 물이 많지 않고 맛도 그리 좋지 않은 대신 향기 하나는 기가 막혀서, 소주에 담가 우려놓기에 적당한 것들이다. 애주가가 있는 집마다 큰 유리병에 매실주가 그득그득 담겨 있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틈엔가 매실청을 만드는 유행으로 바뀌었다.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를 마시지 않고 매실청을 물에 타 먹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탄산음료나 ‘탱’ 가루 같은 분말로 출발했던 여름 청량음료가, 1990년대 초 식혜나 대추, 늙은 호박 같은 한국식 천연재료 음료로 바뀌더니, 얼마 가지 않아 아예 집에서 매실청을 만들어 여름 음료를 만들어 먹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다. 여름 음료란 으레 서양식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우리 입맛에 맞는 한국의 재료, 여기에 건강을 생각한 음료를 선택하기까지 무려 40, 50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굳건히 살아남은 우리의 입맛이 참으로 대견하다.

매실청 만들기는 매우 간단하다. 매실은 굵으면서도 푸른 것이 좋다. 너무 잔 것은 지나치게 덜 자란 것일 수 있고, 노래진 것은 신선도가 떨어졌거나 나무에서 너무 익어 청을 담그기가 좋지 않다. 매실은 꼭지를 떼면서 깨끗이 씻어 한두 시간 동안 체에 받쳐놓아 물기를 말린다.

그 매실을 큰 병에 담고 그냥 그 위에 설탕을 붓는다. 사람들은 흑설탕이 가장 정제되지 않은 설탕이므로 흑설탕을 쓰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흑설탕의 포장지 뒷면을 자세히 보라. 백설탕과 황설탕에는 없는 ‘캐러멜’이 들어있다고 쓰여 있다. 흑설탕이 검은 원당 덩어리를 그냥 부순 게 아니라, 정제해 만든 백설탕이나 황설탕에, 설탕을 태워 만든 검고 끈적한 캐러멜을 넣어 색과 향을 더한 것일 뿐이다.

도대체 설탕을 얼마나 어떻게 넣느냐고? 전문가 레시피로는 매실과 동일한 무게로 혹은 120% 무게의 설탕을 넣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좀 적게 넣는다. 너무 단 것이 싫어서이다.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중에 설탕을 더 넣어주면 된다. 처음부터 매실과 설탕을 뒤섞어 넣은 후 며칠에 한 번씩 뒤섞어 주면서 밑에 가라앉은 설탕을 녹여주는 방법도 있고, 나처럼 그냥 매실을 먼저 병에 담고 그 위에 설탕을 부어놓아도 그리 괜찮다. 어차피 설탕이 그 틈새로 스며들어 내려간다.

아주 큰 병이라면 매실 위에 설탕을 넣는 것을 두세 켜로 해놓으면 된다. 유리병에 매실과 설탕을 함께 섞어놓은 형국은, 거의 하얀 설탕만 보일 정도로 설탕이 많이 들어간다. 5, 6일이 지나 설탕이 녹고 매실이 절어 뜨기 시작하면, 가끔 바닥까지 뒤섞어서 설탕을 녹여주는 게 좋다. 하지만 매실청은 야채효소처럼 칼질을 하지 않고 통째로 담그기 때문에, 엔간히 해도 별로 상하지 않고 그래서 설탕의 양도 좀 줄일 수 있다.

매실 액이 우러나오는 초기에는 매실 열매가 동동 뜨다가 점차 가라앉는데, 이때쯤 액체가 된 청만 따로 따라놓아 보관하는 것이 보통이고, 끓여놓으면 더 이상의 발효를 막아 오래 보관이 가능하다. 매실 열매를 건지지 않고 계속 넣어두면 어떻게 될까. 더 진행되면 씨까지 절여져 약간 씁쓸한 맛이 더 우러나오는데, 취향에 따라 그것도 괜찮다.

매실청은 물에 희석해서 음료로 먹고 생선조림처럼 설탕이 필요한 경우에 대신 쓰면 된다. 그런데 정말 아까운 것은 청을 빼고 남은 그 매실 건더기이다. 그래도 설탕이 배어있는 매실 열매이니 버리기는 아깝다. 열심히 잔머리를 굴려서 재활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쉽게 이용하는 방법은 홍차다. 흔히 홍차에 레몬을 넣는데, 집에서 생 레몬까지 갖추고 살기란 쉽지 않다. 홍차를 우리면서 이 매실 한두 개를 넣어 함께 우리면, 홍차 향과 잘 어울린다.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 물병에도 이 열매를 대여섯 개 정도 넣어 하루 종일 우려 먹어도, 길거리에서 인공향료와 인공색소에 뒤범벅된 청량음료를 사 마시는 것, 혹은 그냥 미적지근한 맹물을 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

생선조림이나 갈비찜에도 매실청 대신 매실 열매를 몇 개 넣는 것으로 충분하고, 샐러드 소스에도 매실 열매를 재활용할 수 있다. 어차피 과일이나 요구르트를 믹서에 갈아 만들 때, 매실 열매를 씨를 빼고 넣어 갈면 시고 향긋한 매실 향이 요구르트 소스를 상큼하게 해준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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