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이 뭐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 정치에는 문제점 제기는 많되 그 해결은 적다. 여야간에, 또는 경선후보간에 서로 공격·폭로하고, 상호검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혹과 쟁점이 제기되지만 진상이 규명되고 개운하게 마무리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큰 선거를 앞두고 정치호흡이 급박해지면서 그런 현상이 급증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보통사람들로서는 판단이 어려운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가령 최근 정계변화의 가장 큰 기폭제가 된 민주당의 광주경선이 있은 후 이른바 음모론이라는 게 나왔지만 그 진상이나 실체가 밝혀진 건 없다. 경선의 정당성을 손상할지도 모를 그런 주장이 나오면 당연히 당사자들간의 논쟁이나 주변의 증언, 당의 자체조사 등을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게 순리요 상식이다. 그러나 발설자도 어물어물 뒤로 빠지고 누구 하나 음모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결론을 내려주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음모론이 제기한 몇가지 의혹이나 정황이 없어진 것도 아니어서 국민 입장에서는 궁금하고 짜증이 날 뿐이다.

음모론 공방 흐지부지

음모론뿐 아니라 다른 의혹도 마찬가지다. 음모론의 한 근거처럼 알려진 유종근 전북지사에 대한 사퇴압력설도 의혹만 제기됐을 뿐 밝혀진 건 없다. 柳지사는 밤중에 자기 아파트를 찾아온 박지원(朴智元) 대통령특보가 후보사퇴 압력을 넣었다는 주장이고 朴특보는 전혀 그런 일이 없다는 주장이다. 둘 중 한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의 망각 속에 묻히려 한다. 자기 다음엔 한화갑(韓和甲)후보가 사퇴할 것이라고 정확히 맞혀 柳지사의 말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찜찜할 텐데 누구도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는다.

얼마 전에 있었던 권노갑씨 정치자금 의혹도 생각해보자. 김근태씨의 양심선언으로 문제가 불거지자 權씨는 김근태·정동영 두사람에게 2천만원씩 지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당시 한 신문은 확인된 權씨 지원자금이 1억원 이상이라고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이를 둘러싼 야당공세에 여당은 이회창 총재의 빌라문제로 맞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權씨 자금의혹은 그냥 넘어갔다. 야당이 김홍걸(金弘傑)씨의 LA저택 의혹을 들고나오면 여당은 이정연(李正淵)씨 해외생활을 거론하는 식이다. 어느 쪽의 진실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 덕분에 국민이 李총재의 빌라문제와 그 며느리의 '원정출산'을 알게 된 것은 소득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쟁점이 이처럼 제기만 되고 어물어물 묻혀버리는 정치풍토는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쟁점이 나오면 당연히 진실이 규명되고 법이나 상식에 따라 처리돼야 종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모론·압력론 등에서 보듯 문제만 떠들어 놓고 결론이 없으니 사람들은 곳곳에서 "진상이 뭐요?"라고 수군대게 마련이고 나라가 만성적인 '쑥덕공론 공화국'이 되고마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의혹은 쌓이게 마련이고 의혹의 당사자는 마치 얼굴에 혹을 붙이고 다니는 꼴이 된다. 만일 이런 혹을 몇개씩 붙이고 대선후보나 대통령이 된다면 경쟁력이나 정통성에 손상이 없을까. 사실 정치의혹들을 규명하지 못한 채 그냥 넘기는 데는 솔직히 언론의 책임도 크다.

의혹축적의 정치 안될 일

언론은 그때그때의 문제를 쫓느라 어제까지 다루던 문제를 오늘 잊어버리곤 한다. 광주경선 보도만 봐도 그렇잖은가. 광주지역 여론조사에서 늘 1등을 해온 이인제 후보가 갑자기 밀렸다면 그 원인이 뭔지,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층 취재·분석해야 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그날 동교동 신·구파는 어떻게 움직였는지, 뜻밖에 1등을 한 노무현 진영의 득표작전은 무엇이었는지, 경선 전날 盧후보가 광주시장 및 5개 구청장과 식사를 같이 한 사실을 유의하라는 李후보측 주장의 의미는 뭣인지 등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신문을 봐도 음모론이 맞는지 안맞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선거를 앞두고 의혹이나 문제점은 더 많이 제기될 것이다. 그런 쟁점 제기를 통해 우리 정치의 문제점들이 추려지고 상호공방과 언론검증 등으로 진실을 밝히고 해결해 나간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정화되고 건강해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의혹들을 제기만 하고 풀지는 못한 채 쌓아만 간다면 마치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악취가 나는 상태로 쌓아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