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04 문화 키워드] 영화 -'웰메이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은 주저 없이 올해 충무로의 키워드로 '웰메이드(Well-made)'를 든다. 실제로 이 단어만큼 최근 영화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것도 드물다.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은 "앞으로 (그가 속한) 시네마서비스가 만드는 영화는 무조건 웰메이드 영화"라고 했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도 "그냥 웰메이드 전쟁영화 한 편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돈 텔 파파'는 '웰메이드 영화 포기 선언'을 홍보 문구로 내세우기도 했다.


영화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말죽거리 잔혹사(왼쪽부터)를 합성했다. 2004년은 형식과 내용의 짜임새가 촘촘한 '웰 메이드' 영화가 풍성한 한 해 였다.

'웰메이드'는 영화 전문용어가 아니다. 단지 '상업적으로 잘 만든 작품'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독 한국 영화계에선 고유명사 비슷하게 통용되고 있다. 2004년은 특히 그랬다. 형식과 내용의 짜임새가 촘촘한, 즉 관람료 7000원이 아깝지 않은 작품에 대한 영화인 및 일반인의 욕구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증거다.

출발은 산뜻했다. 연초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지금 돌아봐도 경이로운 관객 1000만 시대를 가볍게 열었다. 북파공작원, 6.25 같은 묵중한 소재를 잘 버무려 남녀노소의 공감대를 끌어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아 유 레디?' 등 2년 전 영화계를 짓눌렀던 '블록버스터의 재앙'을 말끔히 씻어냈다. '큰 영화'에 대한 공포심을 없앤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의 '후폭풍'이 컸던 걸까. 이후 충무로는 활력을 이어가지 못했다. 예컨대 올해 전국 관객 300만명을 넘은 영화는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를 포함해 고작 네 편에 그쳤다. <표 참조> 지난해 300만명을 넘은 작품은 '살인의 추억''장화, 홍련''스캔들''올드 보이' 등 일곱 편에 달했다. 그만큼 화제작이 적은 한해였다.

짧게 보면 시기의 문제도 있다. 2003년 한국영화의 기초를 다진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장화, 홍련'의 김지운, '올드 보이'의 박찬욱 등 이른바 작품성.흥행성을 겸비한 감독이 올해 신작을 내놓지 않았다. 이들 모두 내년에 새 작품을 선보인다.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능지수 높은 범죄영화 '범죄의 재구성', 도시 무협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 시대풍자 블랙코미디 '효자동 이발사' 등이 주목받았으나 '마의 선' 300만명을 넘지 못했다. 흥행감독 김상진의 '귀신이 산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준익 감독은 관객의 높아진 눈높이를 지적했다. 스타 파워, 대규모 마케팅, 반짝 아이디어로 무장한 기획성 영화가 예전처럼 통하지 않는다는 것. "한국영화도 볼 만하네"식의 애국적 관람은 이제 끝났다고 설명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관객들이 제작사의 기획력보다 감독의 연출력에 눈을 떴다는 점에서 올해는 '감독의 재발견'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웰메이드'는 한국영화의 '부족한 1%'를 채워주는 용어다. 통상 작품성과 상업성이 반비례해온 우리 영화계에 대한 반성적 개념이다. 다만 의욕에 비해 성과가 풍성하지 못했다. 문제는 만듦새고, 질의 향상이라는 '당위'를 새롭게 확인한 셈이다. CJ엔터테인먼트 석동준 한국영화팀장은 "올해 영화농사는 평년작을 밑돌았으나 대작(블록버스터)이 살아나고, 장르적 실험도 활발했다"고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씨는 "1000만명을 동원하는 빅 히트작과 함께 한국영화는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비유했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