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이말 저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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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의 저돌적인 이념공세의 대상이 된 노무현 후보의 답변이 미묘한 파장을 던지고 있다.

盧후보는 지난달 28일 민주당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李후보가 盧후보의 과거 발언을 들춰내 공세를 가하자 "당시 발언과 지금 생각은 같지 않다"고 답변했다. 1989년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운운한 대목에 대해 그는 "장(場)의 논리라는 게 있다"고 했다.

그는 다음날 라디오 방송에 출연,'재벌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 노동자에게 분배하자'(88년 7월 국회 대정부질문)는 발언에 대해 사회자가 추궁하자 "당시 권력과 재벌에 대한 '비유적 야유 발언'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권력과 재벌을 비꼰 발언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장의 논리'라거나 '비유적 야유'등의 용어는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사실 별 내용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청중에 따라 말이 과장될 수 있는 것 아니냐, 또 못마땅해서 비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된 盧후보의 과거발언 내용은 그런 식으로 넘어가기에는 심각한 것이다. 재벌과 노동자 문제에 대한 盧후보의 기본인식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또 盧후보는 그동안 다른 후보를 "정통성·정체성이 없고 원칙과 지조를 지키지 않는 인물"이라며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해 왔다. 그처럼 엄격한 '원칙'을 앞세워 온 그가 스스로에게는 엄격하지 않은 게 아닌지 묻고 싶다.

그러니까 한나라당이 "과거 주장을 지금 와서 부정한다면 현재 주장도 미래에 바꿀 수 있다는 말이냐"며 盧후보를 비난할 빌미를 주게 된 것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도 "10여년 전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盧후보의 발언 취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럴수록 떳떳이 대응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다른 의원은 "盧후보는 더이상 약자가 아니다"면서 "변명과 합리화에 치우치다 보면 앞으로 본격 검증이 이뤄질 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의 발언이 잘못될 수도 있고 정책을 바꿀 수도 있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변해 본인의 생각도 달라졌다면 그 부분을 솔직히 설명하고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노풍(盧風)'을 만들어낸 주역은 기존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이다. 盧후보가 기존 정치인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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