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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은 왜 투기의 대명사일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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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1637년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구근 한개가 최고 5천2백길더였다. 부자 상인의 1년 매출의 두배, 살찐 돼지 8마리 값의 20배에 달하는 액수다. 1636년말부터 다음해 2월까지 네덜란드를 휩쓸고 간 '튤립 열풍(Tulipomania·이 책의 원제)'. 지금까지 광란의 투기, 거품 현상의 대명사로 꼽히는 경제사의 한 예다.

역사학을 전공한 영국 작가 마이크 대시는 튤립의 이동 역사, 가격 변천부터 17세기 네덜란드와 주변 유럽국의 정치·경제 상황까지 재현해 냈다. 튤립이란 독특한 소재를 택한 미시사 연구의 한 부분이다.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만개하면 고개를 숙이는 튤립이 '신 앞에서의 겸손'을 의미한다고 해 사랑을 쏟았다. 이후 1562년 이스탄불에서 수입해온 옷감 속에 묻혀 유럽 벨기에에 입성한 튤립을 식물학자 클루시우스가 재배해 네덜란드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나 튤립의 이국적 아름다움만이 투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은 아니었다. 저축성과 도박성이 강하다는 네덜란드 국민성, 스페인과의 오랜 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전멸하고 레헨트라는 부유한 평시민 집단이 기득권을 잡은 사회 구조의 영향도 컸다.'돈만 벌면 하루아침에 신세가 달라진다'는 심리가 팽배하고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한 유동자금이 풍부했던 네덜란드의 역동성은 튤립을 만나 불이 붙었다. 가난한 직조공도 직조 기계를 저당 잡히고 튤립에 투자했으며 약속 어음에 선물 거래까지 생겼다. 선 페스트란 전염병이 돌면서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이 뛰자 노동자들도 투자 여력이 생기고, 사망률 급등으로 자포자기 심정이 만연했던 것도 과열 투자의 배경이 됐다. 그러나 치솟는 튤립 가격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고 1637년 2월 튤립 거래 시장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인간 탐욕의 종말은 시장 붕괴뿐인가. 여전히 석유·주식·부동산 등 운명을 걸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돈들을 보면 당시의 붕괴도 그리 쓴 약은 아니었던 듯 싶다.

홍수현 기자

NOTE

이스탄불에서 온 옷감 짐에서 튤립 구근을 발견한 벨기에 상인은 투르크 양파인 줄 알고 기름과 식초로 양념해 구워 먹었다. 남은 것을 심은 게 이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또 최상급 튤립은 전체적으로 흰색이나 노란색을 띠고 가장자리 등에 자주·빨강이 얇은 띠 모양을 나타내는 변종이었다. 이 오묘한 색깔은 튤립에만 감염되는 모자이크 바이러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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