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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6년만에 다시 만난 헤라트 주민들 전쟁보다 더한 가뭄 고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6년만에 다시 찾은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는 청명한 하늘과 맑은 햇살로 나를 맞아준다. 시내로 가는 길 양 옆에 총을 든 군인들이 빽빽히 서 있었지만 그 뒤로 보이는 들판에는 연두색 봄 기운이 완연하다. 방금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표정이 평온하고 밝다.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본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따라다닌다. 남자들은 여전히 하얀 터번을, 여자들은 '움직이는 파란 텐트'인 부르카를 쓰고 있다. 매캐한 먼지도, 시장 안의 아름다운 금요사원도, 오후 9시 통행금지도 그대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곳곳에서 나부끼던 하얀색의 탈레반 군기를 볼 수 없다는 거다.

아니, 자세히 보면 달라진 것이 많다. 여자들은 남자 동행 없이도 외출할 수 있고 여자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게 됐다. 공개 처형장이던 공설 운동장에는 축구시합이 열리고 거리에는 인도 영화음악이 흘러나온다. 소수의 젊은 남자들은 전통의상인 비라한 대신 청바지에 양복 상의를 입고 다니며 동네사람의 눈길을 끈다.

나 역시 다른 모습이다.6년 전에는 지나가던 배낭 여행자였는데 지금은 국제 구호단체의 긴급구호 요원이다.

지난번에는 육로로 몰래 국경을 넘었지만 지금은 당당히 유엔 전용기를 타고 군용 비행장에 내렸다. 예전에는 반정부군들을 피해다녔지만 지금은 정부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니고 있다.

월드비전 사무실에 도착해 긴급구호본부 직원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가방도 풀지 않고 지뢰 및 총기 사고에 대한 안전교육을 받았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묻혀있다는 지뢰에다 이번 전쟁 때 생긴 셀 수 없는 불발탄 때문에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단다. 특히 우리처럼 구호활동을 위해 오지로 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말에 약간 긴장이 된다.

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인 헤라트에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단체들이 식량·피난처·의료·교육·영양 및 물자 배급 등, 각자의 긴급구호 전문 분야에서 활약을 펼치는 중이다. 그 중에서 월드비전은 식량 확보 및 배급, 영양과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 10시간 이상 떨어진 월드비전 한국 사업장으로 가기 전, 일주일 동안은 헤라트 근처의 본부 사업장을 방문해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가졌다.

여행을 왔든, 긴급 구호활동을 하든 움직이려면 현지 돈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미화 50달러를 바꾸니 갑자기 백만장자가 된다. 환율은 1달러에 3만아프가니, 1백50만아프가니라는 돈뭉치가 생겼다.

여기 물가는 주식(主食)인 '난'이라는 빵 한개가 2천아프가니, 담배 한갑 (한국 담배 88마일드가 인기 만점이다)이 9천아프가니, 카메라 필름 한통에 8만아프가니다. 공립학교 선생님들이 한달에 1백20만아프가니를 받는다니 월급으로 고작 필름 열다섯통을 살 정도로 임금이 낮다.

지금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놀랍게도 전쟁이 아니라 가뭄이었다. 20년째 온갖 전쟁을 치른 사람들에게 전쟁은 일상이지만 가뭄이 계속되면 꼼짝없이 굶어죽는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이미 4년째인 혹독한 가뭄으로 전 아프가니스탄이 말라붙으면서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실제로 월드비전은 지난달 구호 식량과 함께 농작용 씨와 간단한 농기구를 나누어주었는데 10%도 싹을 내지 못해 극심한 식량난이 예상된다. 이 사람들의 소망은 너무나 소박하다. 이제 신의 도움으로 비가 와서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아이들의 소망은 더 소박하다. 하루 빨리 학교에 다녔으면 하는 거다. 지난 5년간 학교 근처에 얼씬도 못했던 여자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월드비전은 1월부터 헤라트 및 주변지역 여섯 곳에 탈레반이 부순 학교를 보수하고 교사를 확보해 이번 주 토요일 개학을 앞두고 있다. 등록한 여학생이 5천명이 넘는다.

열두살짜리 마리암과 열살짜리 우메로도 며칠 후면 난생 처음 학교에 가게 된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3년째 난민촌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 이 꼬마들이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만 비시아르 코살람(난 정말 행복해요)." 지난 21일은 이슬람 달력으로 새해 첫날.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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