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 주민들이 나서 전통가옥 가꾸고 보존 훌륭한 관광지로 탈바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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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화 '러브레터'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홋카이도(北海道)의 오타루(小樽). 이곳의 상징은 낭만적인 분위기의 운하와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들이다. 이를 보기 위해 인구 15만명의 오타루에 연간 9백만명의 관광객이 몰려온다. 운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처음부터 정부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관광지는 아니다. 1923년 완공된 운하는 70년대 실용성이 없다는 이유로 메워져 신작로로 변할 운명이었다. 그러자 오타루 시민들은 "역사적인 경관을 지키자"며 보존운동에 나섰다. 또 주변의 전통가옥과 근대화 초기 건물들의 보존에도 힘을 기울였다.

타지역 시민들이 이에 동조한 것은 물론 국회에서 운하보존이 정치쟁점화하기도 했다.

결국 정부가 물러서 오타루 운하는 관광명소로 남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개발우선주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역사의 숨결이 배어 있는 전통가옥이나 민가를 소중하게 가꾸자는 시민운동이 크게 확산된 것이다. 이들은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전국마을보존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시민들의 손으로 보존되고 가꿔지고 있는 마을이 전국에 1백여개를 넘고 가옥 수로는 2만5천채에 달한다고 한다.

나라(奈良)현의 이마이(今井)나 오카야마(岡山)현의 구라시키(倉敷), 후쿠시마(福島)현의 오우치(大內) 등이 대표적이다.

작은 섬마을인 가가와(香川)현의 나오시마(直島)와 산골 마을인 니가타현 에치고쓰마리(越後妻有)의 전통민가 보존활동에는 외국인도 참가하고 있다.

또 도쿄(東京) 우에노(上野)에 방치된 한 목조 고가옥에는 부근의 도쿄예술대 학생들이 지난해부터 직접 살면서 보존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일 아침 마룻바닥을 닦아 광을 내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타미와 장지문을 조금씩 고치면서 복원을 진행 중이다. 모두 자원봉사다.

이들의 작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큰 돈 들여 시멘트 들이붓고 페인트칠을 다시 해 마치 무술영화 세트처럼 개악하는 잘못을 피하고 있다. 지역주민들이 주도하는 때문인지 관광객을 의식하기보다는 생활과 보존을 양립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다.

예컨대 2백여년이 지난 이마이의 양조장엔 지금도 사람이 살면서 술을 만들고 있고,1백여년 된 오타루의 창고들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지키려는 것은 국보나 문화재가 아니다. 누가 지었는지, 누가 살았는지도 불분명한 민초들의 집들이다. 정부가 일일이 신경을 쓸 만한 대상도 아니고 길 닦는다고 깔아뭉개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들이다.

그러나 작지만 하나하나 보존돼 그 가치가 확인되자 정부도 행정지원을 해주고 있다.

또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변모해 보존활동이 더욱 확산되는 등 선순환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월드컵 기간 중에는 외국인들을 불러 모으는 데 톡톡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풀뿌리 차원의 전통 계승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셈이다.

이들에게 전통보존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생활 주변의 작은 것에 관심을 두고 지켜나가려고 실천하는 것뿐이다. 일본 사회의 다양성과 문화 저변의 깊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오타루=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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