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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호 인디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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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지난달 21일 '세계 모어(母語·mother language)의 날'을 맞아 "전세계 6천5백28개 언어 중 절반이 타민족의 억압과 유력한 언어의 흡인력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발표했다. 유네스코가 "한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의 사고와 세계관을 이해하는 도구 하나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현재 쓰이는 언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의 코끼리 조련사들이 코끼리를 다룰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힌두어는 물론 인도 내 많은 소수민족들이 쓰는 어떤 말과도 다른 독특한 언어여서,5만년 전 혈거(穴居)시대의 인류가 처음으로 코끼리를 길들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쓰던 말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유네스코는 수백종에 달하던 미국 원주민(인디언) 언어가 지금은 1백50여종만 명맥을 잇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중 나바호족의 언어는 2차 세계대전 때 암호로 이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적국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연구하던 미군이 나바호어에 주목한 것은 우선 문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말 나바호족은 약 5만명이었다. 이들 외에 나바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미국인은 불과 28명이었는데, 다행히 일본·독일계는 한명도 없었다. 게다가 나바호어는 전쟁 전 독일 언어학자들이 연구한 적도 없었다.

군 당국의 설득으로 42년 입대한 나바호족 청년 29명은 4백11개 나바호어 단어로 구성된 암호체계를 개발했다. 전투기는 '벌새', 군함은 '고래', 잠수함은 '쇠물고기', 탄약은 '모든 종류의 조개껍질', 오스트레일리아는 '챙이 말린 모자'였고 중국인은 '땋은 머리'로 이름붙여졌다. 태평양 전선에 집중 배치된 나바호족 암호병은 2차 세계대전 말 4백20명으로 늘었지만 이들의 '대화'를 일본군은 패전 때까지 해독하지 못했다.

9·11 테러 후 미국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풍조가 이는 가운데 최근엔 미 의회가 나서서 나바호족 참전군인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고 한다(본지 17일자 8면). 현재의 나바호족은 인구 20만명으로 미국 내 인디언 보호구역 가운데 최대규모다. 나름대로 수천년에 걸쳐 종족의 생사와 희로애락, 애틋한 사랑까지 담아왔을 어엿한 '모어'가 강자(영어사용자)의 전쟁에서 암호 역할이라도 해야 살아남게 된 세태가 씁쓸하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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