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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11) 미군을 따라 배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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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왼쪽)가 1952년 12월 4일 한국을 방문해 한국군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아이젠하워는 그해 11월 4일 열렸던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 ‘공산당, 한국전쟁, 그리고 부패’를 끝낼 십자군을 자처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60년 현직 미 대통령으로는 처음 한국을 다시 찾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기념 도서관]

아무래도 열쇠를 손에 쥔 쪽은 미국이었다. 한국군을 강하고 안정적인 군대로 육성해 한국의 전선을 스스로 지키게 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한국군에 무기와 장비를 넘겨 전력을 강화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국군의 체질을 기초부터 바꾸기 위해 집중적인 훈련을 실시한다는 미군 지휘부의 방식이 채택됐다.

그 핵심적인 구상은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에게서 나왔다. 그는 훈련과 교육의 명수였다. 그런 그의 눈에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대공세에 힘없이 밀려난 국군이 절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미덥지 못했던 듯하다. 막대한 무기와 장비를 한국군에 넘겨준다고 하더라도 전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으로 본 것이다.

우리에게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비단 51년 5월 중공군의 대공세에 힘없이 무너진 국군 3군단의 얘기만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자주 언급했듯이 국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집중적인 표적이었다.

물론 화력과 장비가 뛰어난 미군을 피해 적군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군을 노리고 치고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상대적인 차이’였다. 조금 드러나는 차이가 아니었다. 장비와 화력의 열세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구석이 있었다. 중공군도 국군의 그렇게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부동(浮動) 상태’라는 말로 표현했다. 중공군의 전사 자료에 나오는 표현이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수초(水草)와 같이 방황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군대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밴플리트의 결정은 옳았다. 겉으로 무장하는 것보다는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무엇인가가 더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가 다시 강릉의 비행장으로 날아온 적이 있다. 그는 그때 내게 “한국군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일단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실천에 옮긴다는 자세를 보였던 그였다. 밴플리트는 다시 내게 “양양에 집중 훈련에 필요한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군에 의해 국군이 처음 본격적인 훈련을 받는 ‘사건’이었다. 밴플리트는 3군단을 해체한 뒤 그 휘하에 있던 3사단을 내가 이끄는 1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는 우선 양양에 만드는 훈련장에서 이 3사단을 집중 훈련시키라고 지시했다.

사병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3사단장 백남권 준장 이하 모든 장병이 훈련을 받아야 했다. 기간은 9주였다. 밴플리트는 이를 위해 야전훈련사령부(FTC)를 구성했다. 토머스 크로스 미 9군단 부군단장을 책임자로 두고 150명의 미군 장교와 하사관을 교관으로 구성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양양에 마련한 교육 훈련장은 향후 대한민국 군대의 요람 역할을 한다. 1년 뒤 대량으로 육성되는 한국군 신설 사단은 이 훈련장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훈련은 가혹할 정도로 펼쳐졌다. 그 골격은 밑바닥의 기본적인 무기 다루기에서 시작해 전술 훈련과 장비 테스트 등이었다. 모든 과정에는 반드시 ‘테스트’가 들어갔다. 분대와 소대·중대별로 각종 훈련을 실시하면서 기본적인 점수를 받지 못하면 되돌려 기초부터 다시 했다. 특히 대대 단위로 종합적인 테스트를 해 수준에 닿지 않으면 과감하게 다시 훈련을 시켰다.

미군 교관들은 모두 베테랑이었다. 한결같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이어서 실제 전투에 필요한 기초부터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요원이었다. 국군 장병은 그들에게서 제대로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웠다.

3사단은 엄격한 훈련을 거쳐 미 10군단에 배속됐다. 그 뒤로 국군의 10개 사단 병력이 모두 그런 훈련을 받았다. 1개 사단이 교대로 전선과 후방 지역에서 이동해 양양을 비롯한 가까운 훈련소에서 그렇게 엄격한 훈련을 거쳐 다시 전선으로 나갔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어 51년 12월 육군참모총장과 협의해 대구에 참모학교도 창설했다. 이듬해 1월에는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진해에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51년 말에는 장교 250명을 선발해 포트 베닝의 미 보병학교에 150명, 포트 실의 포병학교에 100명을 단기 유학으로 보냈다. 성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자 이런 단기 유학 코스는 전군의 거의 모든 장교를 대상으로 실시됐다.

이는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의 체계와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한국군에 이식되는 계기였다. 아울러 한국군의 뿌리가 만들어지는 전기이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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