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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는회계전쟁(下) 조작은 '파멸의 유혹' 뼈아픈 대가 치르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세계적 회계법인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가 지난해 초 35개 주요국의 '불투명 지수'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회계부문 투명도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기업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주가를 띄우거나,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수십년간 회계정보 조작을 당연시해온 결과다.

<관계기사 30면>

이같은 분식회계 관행은 부실 기업에 무더기로 돈이 흘러들게 했고, 결국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투명한 기업회계는 반드시 갖춰야 할 인프라"라고 입을 모은다.

◇분식회계 대가 확실히 치르게 하자=현재처럼 기업들이 자산이나 수익을 부풀려 얻는 이익이 치러야 할 비용보다 훨씬 크다면 회계 조작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엄정한 감시·처벌시스템을 구축해 '분식회계를 했다가 걸리면 망한다'는 인식을 확실히 하는 게 최선"이라고 임종룡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은 강조한다.분식회계 기업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최고 경영자(CEO)는 해임당하며, 회계사는 업무정지를 받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재계의 반발로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집단소송제도 '비용'을 치르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집단소송의 남발로 인한 부작용을 막을 수 있도록 회계 사기 등에 한정해 실시하는 등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주인기(연세대 경영학과)교수는 지적했다.

◇감독당국 감시 역량 높여야=현재 금융감독원에서 분식회계 적발에 투입되는 전문인력은 27명. 그러다보니 1천4백여개 대상기업 중 실제로 감리가 이뤄지는 곳은 5%에 불과하다. 분식회계로 적발될 확률이 교통사고율밖에 안된다면 기업들이 신경쓸 리 만무하다.

회계기준이 모호한 것도 문제다.지난주 분식회계로 징계를 받은 대기업 13개 사도 회계기준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김일섭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회계기준 자체보다 자의적인 해석이 문제"라며 "회계기준 제정권이 있는 한국회계연구원에 해석을 맡겨 판례를 쌓아나가고 감독당국은 그 기준에 따라 징계토록 역할분담을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회계 인력 업그레이드하자=현재 활동 중인 회계사는 약 4천4백명. 인구 1만명당 한명 꼴로 개도국 평균(3.5명)에도 크게 못미친다. "회계법인뿐 아니라 기업·공공부문까지 회계사들이 대거 진출해 우리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 파수꾼이 돼야 한다"고 조장연(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교수는 말한다.

회계사의 직업윤리도 강화해야 한다. 고객을 뺏길까봐 기업체 요구를 있는대로 들어줘선 곤란하다. 공인회계사회의 징계기능을 높여 자체 품질관리를 해나가는 게 시급하다. "솜방망이 처벌 대신 법이나 윤리규정을 어긴 회원에 대해선 업무정지를 요청하는 등 강력한 제재를 해야 일반의 신뢰가 높아질 수 있다."(황인태 금감원 전문심의위원)

◇경영의 투명화, 시장의 성숙이 관건=회계사를 통한 외부감사 이전에 기업체 내부의 회계장부 작성부터 투명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면 경영진이 분식회계를 하지 못하도록 감사와 사외이사가 견제기능을 충실히 해야 한다.

또 투자자들이 기업의 투명성을 따져 투자하는 풍토가 정착된다면 기업들은 시장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시세 차익만 노리는 단타매매 대신 장기 수익성을 따지는 쪽으로 시장이 성숙해지면 기업들의 회계작성 관행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말했다.

신예리·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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