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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친구에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그간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지난번 만났던 때가 아직 1년이 안됐는데도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9·11 테러는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비교적 평온했던 세계를 또 다시 흔들어 놓았습니다. 앞으로 테러리즘을 근절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합니다.

미국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패권(覇權)국가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는 미국이 하기에 달렸다고 하겠습니다. 미국이 지혜롭게, 그리고 정의롭게 행동하면 세계는 안정되고 평온한 시대를 맞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미국이 잘못하면 그 결과는 미국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도 재앙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부시 행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국방예산안을 보면 만일 앞으로 미 국방예산의 증가추세가 이대로 가는 경우 얼마 안있어 미국의 국방예산은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국가들의 국방예산을 합친 액수보다 더 많아질 전망입니다.

국방예산뿐만이 아닙니다. 군사테크놀로지에서도 앞으로 상당기간 미국을 추월할 수 있는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앞으로 상당기간 우리는 모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에 살게 되었는데 이미 주요 국가들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의식하고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9·11 이후에 러시아와 중국은 현저하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강조하고 있고 또 실제로 미국·러시아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좋다고 하겠습니다. 중국도 대미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지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과거 냉전시기에 중국과 긴장상태, 소련과는 협조관계, 미국과는 불신관계를 유지해 오던 인도가 이제는 미국과 친밀한 협조관계를 맺게 되었고, 미국은 친인도 외교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협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파키스탄은 과거에 협조관계에 있었던 중국이 친인도 미국과 협조관계를 갖게 된 상황에서 미국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었지요.

부시 대통령의 동북아 3개국 순방도 역시 미국의 힘과 역할을 잘 보여주었습니다.3개국 모두가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 집중했으니까요.

미국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주도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귀하도 아시다시피 미국은 세계가 하나의 질서를 구성하기를 원합니다. 질서의 구조가 없이 수많은 나라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를 하나의 통합된 체제로 관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절차와 규칙, 그리고 규범과 원칙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미국이 유념해야 하는 것은 첫째로,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규칙과 규범들의 내용이 초강대국인 미국의 이익과 모순될 수는 없지만 또한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이익과도 일치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동안 자유무역의 확대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미국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초강대국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규범과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미국 정부가 수입철강에 과다한 특별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 자신이 주장해 온 자유무역에 모순되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규범을 자신이 준수하지 않을 때 다른 나라들에 순응할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서건 물리적 힘만으로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협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힘과 더불어 정통성(Legitimacy)을 겸했을 때 질서가 가능해진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앞으로 미국은 세계질서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두 슬기롭게 처리해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만, 이제는 미국 밖에 사는 사람들도 미국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기우(杞憂)인 줄은 알면서도 몇자 적었습니다. 계속 건승하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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