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사랑의 궤적 경이롭게 그려 러 문호 푸슈킨의 서사시가 원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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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랑이란 게 대개 그렇다.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여자를 '해바라기'하고, 그 여자는 또 다른 남자를 짝사랑하고 있노라며 훌쩍거린다.

혹은 내가 사랑한다고 매달릴 때 냉정하게 뿌리치던 그는 상처를 다독이며 다른 이와 장래를 약속하자 홀연히 돌아와 잘못을 빌며 새 출발하자고 한다. 상대와 시기가 어긋나서 빚어지는 사랑의 비극. 위대한 사상가·작가들도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될까.

마사 파인즈의 1998년 작 '오네긴 Onegin'(새롬, 18세 이상 관람가)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서사시 '예프게니 오네긴'이 원작이다. 비디오로 조용히 출시돼 소수의 팬들이 가슴 저미는 공감을 했는데 다시 DVD로 출시되면서 원작의 배경·해석·제작의 비밀을 털어놓는 부록까지 덧붙여져 더욱 풍부한 감정 이입과 상상을 돕는다.

영화의 제작자이자 주연 배우인 랄프 파인즈는 학창 시절부터 '예프게니 오네긴'의 영화화를 꿈꾸었고, 그래서 푸슈킨에 대해 8년간 공부했다고 한다. 19세기의 페테스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이 사랑의 비극은 푸슈킨의 삶과 유사한 점이 많아 그의 작품을 되풀이해 읽으며 푸슈킨이 되려고 했단다.

특히 망명 시절에 쓴 이 서사시에 등장하는 결투장면은, 37세에 결투로 숨진 푸시킨 자신의 삶을 예견한 것같아 공을 많이 들여 영화로 재현했다고.

감독을 맡은 마사는 랄프의 여동생으로 뮤직 비디오와 CF 감독 출신이다. 마사는 러시아 전역을 돌며 3백여개의 성을 답사했고, 무대 디자인에서부터 의상·결투장면까지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주력했다고 털어놓는다.

삼촌으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데카당스한 청년 오네긴의 빗나간 사랑의 궤적을 따라가는 비장미 넘치는 시대극.

"악마가 날 언제 데려갈까"라는 음울한 독백으로 시작되는 '오네긴'은 검은 실크 햇과 외투 차림의 오네긴이 페테스부르크의 질척한 뒷골목을 걸어가는 외롭고 격정에 휩싸인 뒷모습, 그리고 병들어 테라스에 앉아 기약 없는 편지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날 때까지 사랑을 경험한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는 경이로운 묘사로 가득하다. 시기·연령·심정·신분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사랑의 상대역 티티아나를 연기한 배우는 리브 타일러다.

DVD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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