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11테러 6개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광기는,

그것이 비록 절망에서 비롯됐다는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 마리 콜롱바니 르몽드 사장, 미 테러참사에 대해

먼훗날 역사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구분하는 결절점으로 9·11을 택할지 모른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한 사람은 비단 조지 W 부시 대통령 뿐만이 아니다. 9·11은 글로벌 시대에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가치관을 혼란시켰고, 문명의 공존을 다시 생각케 했으며, 전쟁과 평화의 개념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탈(脫)냉전의 일시적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찾아가던 국제질서는 9·11이란 격랑을 타고 다시 한번 요동쳤다. 오는 11일로 꼭 6개월이 되는 9·11은 세상을 그렇게 바꿔놓았다.

최초에 9·11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창공을 훨훨 나는 인류의 꿈을 실현시킨 기계문명의 집합체인 민간 항공기가 대량살상무기로 둔갑해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상상력은 할리우드 SFX 영화의 그것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9·11은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공격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테러와는 차원이 달랐다. 19세기 초 영국군의 공격 이후 처음으로 본토를 공격당한 미국은 9·11을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전쟁은 전쟁이되 선제공격을 해온 당사자가 주권국가가 아닌 테러집단이란 점, 공격수단도 종래의 방식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차세대 전쟁'이 시작됐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했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는 법. 미국이 즉각 보복전쟁을 선포한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미국은 '강대국의 무덤'이란 별칭을 갖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시작한 지 불과 두달 만에 탈레반과 알 카에다를 괴멸시키고 수도 카불에 성조기를 휘날리는 전과를 올렸다.그만큼 미국의 전략은 주도면밀했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9·11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의 생사조차 아직 오리무중인 상태다. "지구상에서 테러리즘이 사라질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공언은 영원히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말과 동의어일지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이 겨누고 있는 칼끝의 방향은 서서히 이라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으로 이라크와 이란·북한을 함께 거론해 한바탕 한반도에 험악한 기운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미국이 심중에 두고 있는 타깃은 이라크란 사실이 날로 분명해지고 있다. '불량국가'에서 생산된 대량살상무기가 테러집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삼고 있는 미국은 가장 위험한 고리로 이라크를 지목한 것이다.

2단계 테러전쟁이 언제 시작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단은 아프가니스탄과 필리핀·그루지야 등지에서 진행 중인 테러조직 소탕 작전이 끝나야 한다. 더구나 이라크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그 전쟁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실각과 정권교체까지를 시야에 두는 전면전이 될지, 아니면 대량살상무기 제조시설만 꼭 집어 파괴하는 '스마트' 폭격이 될지도 아직 분명치 않다. 백악관과 펜타곤 등 권부 내에선 이 문제로 치열한 논전이 진행 중인 듯하다.

전쟁은 국제질서의 일대 변화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부시 대통령은 "문명의 편인지 야만의 편인지 선택을 분명히 하라"고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유일 패권국의 오만이 엿보이는 발언이기도 했지만 테러를 뿌리뽑기 위해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빠른 속도로 반테러 연합이 결성됐고 중국과 러시아도 유연한 태도로 미국에 협력했다. 갈등의 소지를 빚을 수 있는 현안들은 모두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미국은 테러위협론을 바탕으로 사상 최대 규모인 3천8백억달러(약5백조원)의 국방예산을 편성했다.

9·11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미국의 패권을 굳히는 데 기여했다고 국제정치학자들은 분석한다. 예일대학의 폴 케네디(역사학)교수는 "독수리가 내려앉았다"는 한마디로 이같은 상황을 요약했다.

9·11 테러가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문명간의 충돌은 아니었음이 시간이 가면서 분명해졌다. 테러는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추방해야 할 인류공동의 적임에 틀림없다는 공감대가 이뤄졌고 거의 모든 이슬람 국가도 대테러 전쟁에 협력했다. 하지만 이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미국은 이제 테러로부터 안전해진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미국인들의 공포는 치유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선 7일 하루 동안 두차례를 비롯, 지난 아흐레 동안 아홉 차례의 대피소동이 벌어졌다.

아랍권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폭탄을 품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확고해질수록 증오는 더욱 깊어가고 반미테러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테러와 전쟁과 증오의 확대재생산, 이 악순환을 끊고 평화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 험난해 보인다. 9·11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처럼 풀기 힘든 숙제를 인류에게 안겨준 것인지도 모른다.

예영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