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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린 비는 그리스 눈물”… 붉은 함성, 빗줄기마저 뜨겁게 달궜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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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호 04면

쏟아지는 빗줄기도 응원 열기를 막지 못했다. 12일 서울광장에는 4만7000여 명이 모여든 가운데 경기 시작 직전 초대형 태극기가 펼쳐졌다. 이정수·박지성 선수가 연이어 골을 기록하면서 서울광장은 열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사진공동취재단]

수비수 이정수의 그림 같은 첫 골이 터지자 4만7000여 명의 인파가 몰린 서울시청 앞 광장은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태극전사들이 코너 바로 앞에서 얻은 프리킥을 차기 전 서울광장에 모인 응원단은 일제히 ‘골, 골, 골’을 간절히 외쳤다. 신기하게도 이어 그리스의 골문이 열리자 와락 부둥켜안고 뛸 듯이 기뻐했다. 붉은악마는 ‘아리랑 아리리요~’로 시작되는 아리랑 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후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자 응원단의 절반 정도는 우의를 벗고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거리응원과 남아공 스케치

후반 7분쯤 다시 박지성의 골이 터지면서 승리를 낙관하는 분위기가 됐다. 오전 9시부터 엄마·아빠·동생·이모와 함께 광장에 나왔다는 박신홍(13·중1)군은 “박지성 선수 짱!”이라며 “응원에 처음 나왔는데 비가 오니까 더욱 신난다”고 말했다.
삼성역 앞 영동대로는 경기 시작 전 왕복 14차로 가운데 7차로에 붉은 물결이 넘실댔다. 경기 시작 후 나머지 7차로까지 통제하면서 도로는 거대한 광장으로 변했다. 첫 골이 터지자 스크린을 중심으로 운집해 있던 5만 명의 인파는 ‘오 대한민국, 승리의 함성’을 연호했다. 감격에 겨운 관중 가운데서는 옆에 있던 사람을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폭죽을 쏘아 올리거나 붉은색 티셔츠로 감싼 ‘부부젤라’를 부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뜨거운 응원전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사진은 12일 광주 월드컵경기장. [연합뉴스]

전날 오후 11시쯤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올라왔다는 회사원 김광희(30)씨는 “수비수여서 골을 넣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첫 골을 넣다니 너무나 짜릿하다”고 말했다. 그는 “월드컵 응원 현장의 열기를 직접 느껴 보고 싶어 친구 4명과 함께 올라왔다”며 “그리스를 2-0이나 3-0으로 이기고 8강까지 진출할 것 같다”고 했다.

첫 골이 터진 이후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이곳 응원단은 우비만 입은 채 숨막히는 경기 장면을 지켜봤다. 강남구청은 경기 시작 후 삼성역 사거리~봉은사 사거리 680m 구간 왕복 14차로 모두의 차량을 통제했다.

한강 반포지구의 ‘플로팅 아일랜드’에도 한국팀의 응원 열기가 가득했다. [SK텔레콤 제공]

홍익대 앞 대형 포장마차인 ‘삼거리 포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는 300여 명이 꽉 들어차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한국에서 영어교사로 일한다는 20대 중반의 미국인은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내 앞에서 잘렸다”며 울상이었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장미란이 금메달을 딴 경기를 이곳에서 보고 한국인의 스포츠 열정에 매료됐다고 했다. 2002, 2006년 서울광장과 광화문 사거리에서 응원을 해 왔던 붉은악마는 상업성을 배제한 곳에서 응원을 하겠다며 주요 장소를 영동대로로 옮겼다. 실제로 1000여 명의 붉은악마 회원은 오후 2시부터 영동대로 인근에 자리 잡고 붉은색 티셔츠에 노란색 우비를 맞춰 입고, 록밴드의 공연에 맞춰 열띤 응원전을 벌였다.

플래시몹 응원에, 스마트폰 응원도 등장
한승희 붉은악마 현장팀장은 “준비 과정에서 부침이 있었지만 경기 전에 서울시 측과 잘 해결돼 다행”이라며 “비 때문에 시민들이 예상보다 적게 모였지만 남아공에 있는 태극전사들에게 힘이 되도록 응원을 멈추지 않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16강 진입을 염원하는 응원전은 한강 반포지구의 플로팅 아일랜드에서도 펼쳐졌다. 서울시청 앞 광장 응원전을 준비한 SK텔레콤이 마련한 것이었다. 도심 위주의 거리응원에서 벗어나 한강시민공원을 배경으로 한 첫 응원전이었다.

영동대로 응원전에는 플래시몹이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플래시몹은 e-메일이나 휴대전화로 연락해 약속 장소에 모여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특정 행동을 하고 순식간에 흩어지는 군중을 말한다. 오후 3시, 1000여 명의 서울종합예술학교 학생과 교수가 붉은색 티에 같은 두건을 두르고 도로에 모였다. 무용과 학생들이 앞에서 선보이는 안무를 따라 함께 춤을 춘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용과 2010학번 정예진(19)씨는 “학교에서 플래시몹 행사를 기획했다고 해 참여했다”며 “거리에 나오니 흥분되고 집에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재미있다”고 전했다. 서울종합예술학교 교학처 직원인 김성진(28)씨는 “가수 이효리의 안무가인 정진석씨가 오늘 플래시몹을 위해 안무를 짜 줬다”며 “일반 시민들도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함께 응원을 나온 대학생 30여 명이 눈에 띄었다. 대학가의 여러 마케팅 관련 동아리 소속인 이들은 아이폰용 애플리케이션 아이레즈(iReds)를 통한 응원 이벤트를 준비했다. 연세대 디지털게임교육원 재학생들이 만든 이 애플리케이션 화면에는 한국응원단을 상징하는 붉은 뿔이 그려져 있고, 이를 흔들면 ‘짝짝짝 짝짝’ 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강성택(25·성공회대 디지털컨텐츠학과)씨는 “아이레즈를 이용한 플래시몹을 해 보려고 한다”며 “월드컵 응원전이 기업 홍보 등 상업화된 측면이 많다고 생각해 순수하게 놀이 형태의 응원을 시도해 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하며 쏟아진 빗줄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월드컵 거리응원전의 패션도 달라졌다. 비가 내리면서 기온도 크게 떨어져 예년에 비해 과감한 노출 패션은 줄었다. 대신 대부분의 응원객이 긴 팔 우비를 기본으로 챙겨 입었다. 또 발에는 젖어도 상관없는 샌들을 신거나 신발 위에 비닐봉지를 덧신처럼 신고 발목에서 봉지 끝을 묶는 새로운 차림이 등장했다. 비옷을 파는 상인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물론, 발 빠르게 고무 소재 슬리퍼를 한 아름 들고 나와 서울광장 주변에서 판매하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비 때문에 달라진 월드컵 패션
빨간 티를 입은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머리에 붉은색 두건을 쓰고 시청 앞 광장을 찾은 영어교사 댄(31·영국)은 “영국에 살 때는 이렇게 밖에 나가 응원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2002년이랑 2006년 월드컵 때 방송에서 여기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응원 현장을 소개한 것을 보고 완전히 놀랐다. 꼭 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보게 됐다”며 “오늘도 2002년 때처럼 사람이 많이 와 신나게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댄은 동료 영어교사들과 함께 나왔다고 했다. 한편 경찰은 이날 40개 중대 3200여 명의 병력을 응원 장소 주변 곳곳에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남아공 현지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의 응원전에서는 한국이 기선을 제압했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붉은악마와 아리랑응원단, K-리그 서포터스 연합 소속 200여 명은 현지 교민 300여 명과 협력해 조직적인 응원을 펼쳤다. 이들 응원단은 경기가 시작되자 경기장 양쪽에서 대형 태극기를 일제히 펼쳐올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반면 그리스 축구팬들은 별다른 준비가 없었다.

CNN·BBC 등 주요 외신들도 한국과 그리스 경기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한국의 선전을 전했다. CNN은 한국팀이 선취득점하자 정규 방송 도중 화면 아래 긴급 뉴스 자막을 내보냈다. CNN은 “FIFA 월드컵 둘째 날 세 번째 경기가 진행 중인 가운데 한국이 경기 초반 그리스에 1-0으로 리드하고 있다. 전반 7분 이정수가 골을 기록했다”고 속보로 전했다. BBC방송도 웹사이트에서 긴급 뉴스로 한국이 선취골을 넣자마자 그리스에 1-0으로 리드하고 있다고 전했다. BBC는 “한국이 일찌감치 골을 넣어 그리스에 1-0으로 앞서고 있다”며 두 나라 간 경기를 실시간 문자 중계로 서비스했다. BBC는 문자 중계에서 “전반 7분 한국이 선취골을 넣었다. 그리스 감독 오토 레하겔은 기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코너플랙 근처에서 프리킥을 얻어 이를 기성용이 찼고 이 공이 똑바로 그리스 수비수를 넘어 이정수에게 연결돼 가볍게 득점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BBC는 문자 생중계 코너에 한국의 경기 모습을 찍은 사진도 함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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