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답’ 집장사 … 비운의 주택업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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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러지는 업체들? 모두 주택사업을 많이 하는 곳 아닙니까. 그래서 주택업체들은 대체로 끝이 안 좋다고 해요. 천수답 형태의 사업 구도만 벗어나면 주택은 참 매력 있는 사업인데….” 주택사업 비중이 40% 정도 되는 한 대형 건설업체 사장이 최근 사석에서 꺼낸 말이다. 주택시장이 위축돼 아파트가 안 팔려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끝이 뻔히 보이는 주택사업에 회의가 든다는 것이다.

천수답(天水畓). 빗물에만 의존하는 논을 말한다. 요즘의 첨단 산업 환경에서는 터무니없는 얘기일 수 있지만 적어도 주택건설업은 아직도 천수답 구조를 띤다. 하늘(정부·금융권)에서 비(규제 완화, 자금 지원)가 내리면 흥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하기 십상이다.

요즘이 딱 그렇다. 2007년부터 줄곧 가뭄이 들면서 지난해 이후 중견 주택건설업체 37곳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부도가 났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별로 낯설지 않다. 외환위기 직후가 생각나서일까.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주택시장은 우성·청구·우방 같은 주택 전문업체들이 주도했다. 이것저것 따져본 뒤 뛰어드는 대형 업체보다 오너가 직접 사업을 챙기는 중견 업체들이 더 활발히 주택사업을 벌였다. 90년대 중반 ㈜건영의 오너였던 엄상호 회장은 “집 지을 땅을 내가 직접 보고 그 자리에서 살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대형 건설사보다 사업을 빨리,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삼성이나 대우건설이 연간 5000가구도 내놓지 못했는데 우성이나 청구 등은 1만 가구 이상을 분양했다(한국주택협회 조사). 하지만 이들 업체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97~98년 청구·우성·한신공영 등 중견 주택업체 250여 곳이 부도나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부동산 규제가 시작되고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생긴 일이다.

경기가 나빠 집은 안 팔리고 은행에서 돈줄을 죄니 쓰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우성과 건영은 회사 이름만 남은 채 주택사업은 거의 못하고 있고 청구·우방은 인수합병으로 명맥만 이어 가고 있다. 주택으로 명성을 날렸던 한신공영은 다른 업체에 넘어갔다. 주택 전문업체 중 지금도 활발히 사업을 하는 곳은 현대산업개발 정도다. 당시 현대그룹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큰 병을 치렀던 주택업계의 악몽이 10여 년이 지난 요즘 되살아나고 있다. 2000년대 초 부동산 규제가 풀리면서 급성장한 ㈜현진이 부도나는 등 지난해 이후 부도·워크아웃에 들어간 업체가 줄을 잇고 있다. 올 들어서는 성원건설·남양건설·풍성주택 등 인기 아파트 브랜드로 이름을 날리던 곳들이 쓰러졌다.

최근 금융권의 살생부에 적힌 10여 곳의 중견업체 대부분이 주택건설업체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주택사업을 운에 의존하다시피 하니 기업을 오래 끌고 가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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