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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 35세에 이룬 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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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야구는 잘하지만 말은 못하는 선수'.

프로야구 구대성 선수에게 따라다니는 말이다. 어눌하다. "기분 좋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고작이다. 별 유머도 없고 농담 같은 것도 잘 안 한다. '구대팔'이라는 별칭에 그냥 씩 웃을 뿐이다.

그 조용함 뒤에는 따스함이 있다. 한국시리즈 MVP(최우수선수)에 올랐던 1999년 한 코칭스태프의 부인이 백혈병에 걸리자 상금 1000만원을 통째로 내놓은 '의리파'다. 4년 전 일본(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진출한 뒤 한국에 왔을 때 사람을 통해 "불우이웃 돕기에 보태라고 해달라"며 친정팀 한화쪽에 2000만원을 남기고 가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신용카드 한 장이 없다. 그냥 부인(권현정.33)에게서 용돈을 받아 쓴다. 일본에 가기 전까지 20평대 주공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메이저리그 명문 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는다. 9일(한국시간) 입단을 확정지었다. 해가 바뀌면 서른여섯. 선수로서는 '중년'의 나이에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꿈을 잡았다. 정확한 계약 내용은 10일 공식발표된다. 2년 계약에 300만달러(약 31억5000만원) 정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양키스는 1901년 창단해 26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오랜 전통과 역사의 팀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유없이 양키스 입단을 원했어요. 기분이 아주 좋네요. 원하는 곳에서 꿈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미국에 머물고 있는 그는 입단이 확정된 뒤 모처럼 길게 말했다.

"마운드에 서면 항상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공을 던집니다. 부담 없이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겁니다."

대전 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 형(구대진)을 따라 야구부에 들어갔으니 25년간 야구를 했다. 대전고 2학년이던 87년 강호 신일고와 연습게임을 할 때다. 1회초 1, 2, 3번타자를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다. 무사 만루. 급히 마운드로 올라간 감독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를 테스트해보는 겁니다." 앞으로 숱하게 많은 위기를 맞을 텐데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갈지 일부러 시험해보는 거라는 설명이었다. 그러고는 4, 5, 6번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정면승부를 좋아하다 보니 가끔 감독의 사인도 무시하는 그다. 하지만 '노력형'이다. 몸이 무겁다 싶으면 팀 훈련 전에 혼자 나와서 몸을 풀기도 하고, 쉬는 날 튜브 당기기를 수천 번씩 하기도 했다. 스튜어디스 출신인 부인 권씨와 5년 연애 끝에 결혼해 아들 상원(10)과 딸 영은(8)을 두고 있다.

?야구인생 25년=150㎞의 강속구와 슬라이더.체인지업을 주무기로 하는 왼손 투수다. 대전고 시절 청룡기 우승을 이끌었고, 한양대를 거쳐 1993년 프로야구 빙그레(현 한화)에 입단했다.

96년 18승24세이브3패에 방어율 1.88로 투수 3관왕(다승.구원.방어율)에 오르며 MVP가 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전에서는 일본의 '괴물투수' 마쓰자카와 맞대결해 1실점 완투승을 거둬 '일본 킬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해 시즌이 끝나고 일본에 진출했고, 다시 4년 뒤 양키스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 94년 박찬호(31.텍사스 레인저스) 이래 28번째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다.

양키스가 전성기가 지난 구대성 선수를 영입한 건 내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특급 왼손투수가 꼭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양키스에는 현재 21명의 투수 가운데 왼손 투수는 4명뿐이다. 구대성은 왼손 강타자를 막기 위한 릴리프나 1~2이닝 중간계투로 뛸 것 같다.

손장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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