訪韓 뒷얘기 : 기습점거 당한 美상의 회장에 조크 부시 "나보다 당신이 당해 다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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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일 도라산역 연설에서 '악의 축'에 버금가는 대북 강경발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회담 준비 실무접촉에서 미국측은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한 상태에서 아무 말도 않고 갈 수는 없다"면서 북한 정권을 '악의 정권(Regime of Evil)'이라고 부르겠다고 밝혔었다는 것.

이 때문에 정부는 절대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된다는 뜻을 직·간접으로 미국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이에 카렌 휴스 백악관 고문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기자들에게 "AOE('악의 축'을 가리키는 은어)는 빠진다"고 확인해줬다고 한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다른 나라 정상들과 회담을 할 때 논리적으로 꼬치꼬치 따지고 설득하는 스타일. 그러나 전윤철(田允喆)비서실장은 "부시 대통령의 성격을 감안할 때 논리적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문제는 실무자들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고 건의, 金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레이건 교훈' 카드 준비=특히 金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레이건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점에서 '레이건 교훈'을 회심의 설득카드로 오래 전부터 준비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21일 전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했지만 결국 대화를 통해 상황을 타개했다"는 내용.

이 논리는 부시 대통령 방한 나흘 전인 지난 15일 金대통령이 이홍구(李洪九)전 총리 등 각계인사와의 오찬간담회에서 꺼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국에 투자·진출한 자국 기업인들에게 '한국이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성이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자제시켰던 것으로 청와대측은 분석했다.

또 한국에선 국민감정이 상황을 좌우하기 때문에 여론을 의식해야 한다는 자체 점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우호적인 조언을 했을 것 같다"는 추측도 했다.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21일 청와대 리셉션 행사는 부시 대통령이 방한기간 중 유일하게 주한 미국인들과 만난 자리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국 땅에서 자국민들과 담소를 나누는 편한 분위기여서 부시 대통령은 방한 소감 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밝혔다고 한다.

만찬에 참석한 미국인들은 대부분 미국계 기업 대표들로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회장, 샤자드 라즈비 씨티은행 대표, 피에트로 도란 모건 스탠리 상임고문 등.

이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지난 18일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의 주한미상의 사무실 점거 농성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방한 직전 점거 농성사건을 참모진에게 보고받아 알고 있다.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존슨 회장에게 얘기한 것.

존스 회장은 "부시 대통령은 대화 도중 '그래도 나보다 당신이 당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 아니냐'고 조크를 던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는 부시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 "오히려 미국측은 우리 정부의 신속한 대처에 고마움을 표시했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미 기업인은 "행사에 참석한 부시 대통령의 참모들로부터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원하고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고 전했다.

부시 방한 반대에 참여했던 시민단체들은 21일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대체로 환영했다.

전영기·표재용·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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