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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역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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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설적 프로레슬러 역도산(1924~63)의 열정과 좌절을 그린 영화 '역도산'(15일 개봉)은 관객을 세번 배신한다.

첫째, 감독 송해성. 3년 전 '실패(흥행)한 걸작(평가)'으로 불린 '파이란'에서 동네 양아치에게도 치이는 '대한민국 최고의 호구', 즉 구제불능의 3류 인생을 오밀조밀하게 묘사한 그가 이번에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앞으로만 질주했던 역도산에 도전했다. 카메라를 '졸장부'에서 '영웅'으로 180도 돌렸다.

둘째, 인물 선택. 역도산은 패전의 시름에 빠졌던 일본인의 자존심을 되살렸지만 우리에겐 어쩐지 낯설다. 40대 이상은 옛 흑백 TV에서 김일의 박치기에 환호한 적은 있으나 역도산의 '가라테 촙'(당수)을 직접 보진 못했다. 게다가 대사의 97%가 일본어.

셋째, 레슬링. 요즘 10대가 흠뻑 빠져있는 이종격투기에 비하면 액션도, 기술도 화려하지 않다. 110억원이 들어간 상업영화치고는 다소 무리수를 둔 셈. 관객 대다수가 10~20대인 현실에서 '역도산의 레슬링'은 '전설 따라 삼천리'일 수 있다.

한마디로 '역도산'은 모험이다. 한국.일본 시장을 동시에 겨냥한 야심작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가벼운 풍속도, 발랄한 웃음도 없다. 오직 우직하게 인간 역도산을 파고드는 '뚝심의 영화'다.

그리고 '역도산'은 배신을 또다시 배신한다.

첫째, 영웅이 없다. 할리우드의 수퍼 히어로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정상에 오르려고 했던, 강한 척하지만 약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에 집중한다. 과장.미화 대신 정직.사실에 승부수를 걸었다.

둘째, 탈민족적이다. 역도산에게 중요한 건 조선도 일본도 아니다. 심지어 "조선이 내게 해준 게 뭐냐"고 반문한다. 그는 많은 재일동포와 달리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생존, 그리고 성공만 있을 뿐.

셋째, 역시 설경구. '체중 조절의 달인' 설경구는 무려 몸집을 20㎏ 가까이 불리며 '진짜' 레슬러가 됐다. 실전과 흡사한 레슬링 장면은 때론 통쾌하고, 때론 처절하다. 절규하고, 분노하고, 환호하고, 포효하는 그의 풍부한 몸짓은 영화의 백미. 경기 장면이 적어 아쉽지만 링에 번지는 선혈보다 한 야심가의 가슴에 맺히는 핏방울을 생각하면 크게 불평할 일이 아니다.

'역도산'은 요즘 보기 드문 선 굵은 드라마다. 그래서 놓치는 대목도 적지 않다. 아내(나카타니 미키) 등 주변 인물과의 갈등이 단선적이다. 비장감 어린 문어체 대사도 버겁다. 어쩌면 역도산이란 인물, 그가 버텨냈던 시.공간이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대신 감독은 역도산이 야쿠자의 칼에 쓰러지는 마지막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처리하면서 야망과 성공의 뒤꼍을 또 한번 비튼다. '파이란'과 '역도산'이 맞닿는 지점인 것 같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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