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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 영<피아니스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24시간 삶 중 음악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내 생활에서 잡식성 독서는 중요한 밑천이다. 글을 겨우 깨칠 무렵, 내가 가장 애독했던 책은 엉뚱하게도 가죽 장정의 어른용 대백과사전과 생물도감이었다. 특히 도감들에 집착을 보여 부모님 기억으로는 새들의 학명까지 줄줄 외웠다고 하니 생물학도로의 꿈은 열 살 때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만나면서 꺾이게 된다. 결국 내 호기심은 오직 천연색의 화보들에 있는 수준임이 확실해진 것이다.

사춘기 들어 에밀리 브론테 자매들을 포함한 영국계 여류 작가들로 바뀌었고, 그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북유럽의 습한 바람은 나를 러시아 문학, 그 중에서도 안톤 체호프의 희비극들로 이끌게 된다. 간결한 풍자와 시니컬한 결말이 매력적인 그의 이야기들은 대학시절 러시아 유학의 실마리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모스크바 시절 가장 많이 만났던 작가는 다름아닌 스티븐 킹이었다. 그는 인간이 겪는 감상과 느낌을 결코 외부의 요인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오직 개인의 내부에 침잠해 그 실체를 뽑아낸다. 『불면증』『그린마일』 등 킹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현대음악이란 말이 무색해진 시점이지만, 20세기의 작곡가들, 그 중 쇤베르크·베르크·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 등의 작품에 최근 몰입하면서 절실하게 된 것이 지난 1백년간 일어났던 여러 다툼과 전쟁에 대한 배경지식이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가 26명이 저술한 『20세기의 역사』(가지 않은 길)는 냉정한 시각과 명확한 통계가 돋보인다. 참으로 말하기 힘든 '우리들의 현재 이야기'를 그 정도의 균형으로 풀어나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방향과 배경은 다르지만, 문화평론가 박용구 선생의 대담집 『20세기 예술의 세계』(지식산업사)도 흥미롭게 읽었다. 정지용·임화·김순남 등 예술인들의 부활을 대선배로부터 전달받는 기분은 너무도 생생했고,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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