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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날처럼 넉넉해 지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나의 설날은 풀이 빳빳한 흰 두루마기들이 겨울의 빈 들판을 사각사각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로부터 떠오른다. 흰 눈이 내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늘푸른 소나무에 찬바람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한 이런 소리를 내며 설날은 그리운 친척들을 먼 곳으로부터 할머니가 계시는 우리 집으로 불러모았었다. 그분들의 손에는 고기가 한 마리 들려 있기도 했고 곶감이나 과일, 문어나 김 같은 것들이 들려 있기도 했다.
온가족이 새 옷을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색동저고리에는 금박이 물려 있었다. 모두 함께 세배를 하고 새로운 시간을 새기는 덕담과 함께 세뱃돈을 받았다. 세뱃돈은 꼭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 시집온 며늘아기에게도 따뜻한 사랑과 함께 주어졌다. 그녀들이 입은 남끝동 노랑저고리와 그녀들이 풍겨내던 수줍고 향기로운 분 냄새가 지금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집안이 모처럼 이렇듯 북적이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꽃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세뱃돈의 무게에 가슴을 더 많이 두근거렸었다. 설날 아침,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부자였다. 머잖아 봄이 오면 저 들판에는 푸른 싹들과 아지랑이가 일렁이리라.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는 새로운 시간이 새겨지리라.
둥글고 하얀 달이 둥실둥실 떠있는 떡국을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나눠먹는 설날은 이렇게 기쁘고 벅차게 시작되었다. 묵은 해에 진 삶의 빚을 청산하고 새로 설빔을 갈아입고 희망의 말을 주고 받으며 시작하는 참으로 기막힌 상징과 의미가 있는 날인 것이다.
기실 우리들의 진짜 설날은 섣달 그믐날 밤부터 시작됐었다. 요즘에는 고속도로가 밤새 밀리고, 제야의 종소리를 듣느라고 밤을 밝히지만 어린 날에도 설 전날밤부터 우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집안팎에 불을 밝혀놓고 잡귀를 쫓아내느라 잠을 설쳤고 심지어 화장실에도 불을 밝혀두었는가 하면 집집마다 마당을 깨끗이 쓸고는 마당 한쪽에 모닥불을 피워 묵은 시름과 잡귀들을 밤새 불살랐다. 더구나 섣달 그믐날밤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해서 아이들은 모두가 눈을 반짝 반짝 뜨고 밤을 밝혔다.
어느 해인가 나는 그만 졸음을 참지 못해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진짜로 눈썹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너무 놀라서 앙하니 울음을 터뜨렸는데 짓궂은 사촌언니가 나의 눈썹에다 떡가루를 발랐다고 한다.
설날 아침부터 아이를 울린다고 오히려 언니가 야단을 맞았지만 슬쩍 보니까 식구들이 나 몰래 모두 킥킥 웃고 있어 다시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었다. 설날만 되면 모두가 이렇듯 다시 아이처럼 천진해진다. 오색 꿈을 색동저고리에 새겨 입고 멀고 가까운 대소가들과 다시 만나 함께 큰 가마솥에 떡국을 쑤어 나누어 먹는다.
그렇게 일년을 시작하고 새 희망의 첫장을 새기는 설날이다. 단순히 새 옷이 아니라 새 마음을 입는 설빔의 의미와 위 세대와 아래 세대간의 따스한 존경과 사랑의 의식인 세배는 진실로 우리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풍속이다.
너무 현대인의 캘린더에 맞추어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새로 또 설을 맞는다. 나도 몰래 초침을 닮아버린 내 발걸음의 속도를 또한 돌아다본다.신문이나 텔레비전은 귀향의 의미보다는 귀향 길의 체증을 더욱 크게 보도하고 설날 아침의 덕담과 설빔이 주는 의미보다는 물가와 편리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돌아보아도 가족끼리 서로 세배를 나누고 새 옷을 입고 새로운 마음을 담으며 하얀 달 모양의 떡국을 만들어 먹으며 한 절기를 시작하는 민족은 본적이 없다.
저 막무가내의 혈육을 향한 귀향길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도 이어지고 아름다운 꽃주머니의 세뱃돈이 추운 이웃에게도 나누어질 날을 기다리며 올해는 특히 저 노래 속의 까치들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부러워할 즐겁고 아름다운 설날을 맞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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