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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山 김준근 풍속화 21점 1백여년만의 귀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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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9세기말 우리 조상들의 삶을 그린 기산(箕山)의 풍속화 21점이 1백여년만에 돌아왔다. 기산은 구한말 풍속화가인 김준근(金俊根)의 호. 기산은 당시 우리나라를 찾았던 외국인들에게 풍속화를 많이 그려줘 그의 작품은 유럽 박물관에 여럿 소장돼 있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숭실대박물관이 화첩을 소장하고 있는데 먹으로만 그린 것이다. 이번에 돌아온 기산풍속화는 1886년 우리나라를 찾았던 독일인 카르 오트 뤼어스(Carl Ott Lhrs,1864~1914)가 수집했던 것. 풍속화를 상속받은 그의 셋째 딸 마르타 베게만(Martha Begemann)이 최근 "그림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뜻과 함께 명지대 LG연암문고(이사장 유영구)에 기증해왔다.| "기산 풍속화는 1백년 전 민중생활을 담은 그림 백과사전입니다. 카메라 대신 당시 사회의 장면 장면을 포착해 외국인들에게 판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합니다. 그림의 격(格)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모습을 정확하고 다양하게 기록한 점은 특이합니다. 구한말에 풍속화를 그린 화가가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아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요."
LG연암문고 박태근(관동대 명예교수)씨의 설명처럼 기산은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이 외국의 주요 유명 박물관에 깔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단원 김홍도 등이 풍속화를 그렸던 영·정조 시대 이래 맥이 끊어진 풍속화를 수백 점씩 세트로 양산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외국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린 점 등이 모두 특이하다.
단편적이지만 기산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886년 무렵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 체결에 공로를 인정받은 미국인 R W 슈펠트 제독이 고종의 초청으로 조선에 도착했을 때 제독의 딸이 부산 초량에 살던 기산에게 부탁해 풍속화를 얻었다는 것이다. 당시 부산 지역에서 이미 알려진 풍속화가였다는 얘기다.
기산은 이어 1889년 부산에서 선교사 J S 게일을 만났으며, 그를 따라 원산으로 거처를 옮긴뒤 1892년 게일이 유럽 문학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번역한 『천로역정』의 도판(圖版·책 속에 담긴 그림)을 그렸다.
기산이 이처럼 외국인 선교사와 활동을 같이 하면서 거처까지 옮긴 점 등으로 미뤄 일부에선 그가 기독교도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어쨌든 19세기 말 기산의 풍속화는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음이 분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기산풍속화 컬렉션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을 상대로 한 무역회사로 유명했던 마이어 주식회사의 사장인 E 마이어(1841~1926)의 것이다. 그는 대한제국의 독일제국 영사까지 맡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거물인데, 기산의 그림을 61점이나 수집해 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번에 돌아온 그림은 독일인 마이어와 함께 제물포에 세창양행이란 지사를 만들고 활동했던 뤼어스가 수집한 것이다.
뤼어스는 일본을 거쳐 조선 제물포에 상륙, 1907년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뤼어스의 딸 베게만은 직계 후손이 없어 수년 전 변호사와 상의한 뒤 "한국에서 온 것인 만큼 나보다 한국인들에게 더 소중한 물건"이라며 명지대측에 기증 의사를 전해왔다.
기산 풍속화는 19세기 말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에 삽화로도 많이 사용됐다. 프랑스 민속학자 C 바라가 쓴 『세계일주』(1892년)의 '한국여행'부분에 36점의 그림이 실려 있으며, 영국군 대위 A E J 캐번디시가 쓴 『한국과 성스러운 흰산(백두산)』(1894년)에도 20점이 수록돼 있다. 이밖에 독일인 E 짐머만이 쓴 『한국의 미술』(1895), 미국 고고학자 S 컬린의 『한국의 놀이들』(1895) 등에도 그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밖에 외국 주요 박물관으로는 함부르크 외에 네덜란드 민속학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민속학박물관, 모스크바 동양학박물관 등에 그의 그림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함부르크에 소장된 기산 풍속화첩을 도록으로 펴낸 조흥윤(한양대·인류학)교수는 "기산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5백점을 넘는다. 그러나 국내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컸었다. 이번에 일부나마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비록 그가 정식 화원(畵員)도 아니고,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높지 않다 하더라도 민속학이나 인류학적 측면에선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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