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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흠~" 古에 밴 선조의 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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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입춘(春·4일)이 지나고 설 연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처럼 만나는 부모 형제와 고향 친구 생각에 마음만 분주하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매화가 소담한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다는 화신(花信)이 남녘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고향에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다 귀성 차량이 몰리면 짜증나게 마련이다. 이럴 때 자녀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민속마을을 둘러보면서 고향을 찾아간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반촌(班村), 쉬운 말로 '양반 마을'하면 대개 경북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못잖은 양반 마을이 경주에 있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의 양동(洞)마을이다.
경부고속도로 경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포항 방향으로 가다 영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28호선을 달리다 보면 도로 우측에 양동마을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마을은 14~15세기 첫발을 내디딘 여강(驪江)이()씨와 월성(月城)손(孫)씨의 집성촌. 조선 시대에 인물을 적잖이 배출한 마을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회재(晦齋)이언적(彦迪·1491~1553년)선생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언적 선생은 퇴계 이황보다 한발 앞서 성리학 주리론(主理論)의 체계를 세운 학자로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김안로(安)의 등용을 반대하는 바람에 관직에서 쫓겨난 뒤 학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김안로가 파직되자 다시 조정에 나가 이·예·형조 판서를 거쳐 좌찬성까지 올랐다. 그러나 윤원형(尹元衡)등에 의해 귀양을 가서 저술 활동을 하다 63세 때 세상을 떠났다.
양동마을은 1백50여채의 전통 가옥 중 2백년 이상 된 가옥이 54호나 된다. 또 국가·경북 지정 문화재가 20개에 이른다.
여기에 산세와 고택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말 문화재청이 유네스코(UNESCO)세계 문화유산 등록을 신청할 후보로 지정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간다.
이 마을은 설창산(雪蒼山)을 주산(主山)으로 해서 서쪽으로 기계천(杞溪川)이 흐르고 남쪽에서 형산강(兄山江)이 마을로 흘러들어온다. 전형적인 양택(陽)의 입지조건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설창산 종주봉(宗主峰)에서 형산강을 향해 능선이 '말 물'(勿)자 형태로 뻗어 있는데 능선과 골짜기 속에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고건축에 대해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마을 안으로 들어가 돌담 또는 흙담을 따라 걸으면서 한없이 눈 맛을 즐길 수 있다. 조상들의 생태주의 정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완만한 비탈을 찾아 그대로 집을 앉혔을 뿐 요새처럼 '형질 변경'을 해 경사면을 깎아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때문에 집 안팎으로 향나무·백일홍·느티나무·회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그러니 굳이 집안에 인공적으로 정원을 꾸며 담장 안에 자연을 가둬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집을 두른 담장 모습 역시 산세와 어우러져 있다. 담장이 그리 높지 않아 외부에서 볼 때도 위압감이 들지 않는다. 자연히 집 안에서는 바깥 풍경이 내 집 앞마당처럼 보이게 된다.
기와 또는 초가 지붕과 담장 그리고 그 뒤편의 능선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대부분 노년층인 마을 주민들은 삶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양동마을 보존위원회 이대식(76)회장은 "이곳은 풍수지리상 안동 하회, 봉화 닭실과 함께 3대 명당에 속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6·25 사변 때도 몇집만 소실되고 마을이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조상님과 하늘이 도와준 덕"이라고 말했다.
양동마을에서는 5백여년째 마을에 뿌리 내려온 효와 자애의 정신을 만날 수 있어 더욱 반갑다. 보일러보다 군불을 좋아하는 노모 때문에 아직도 장작을 패는 늙은 아들, 설 연휴 때 내려올 자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사랑방과 문간방을 청소하는 노모에게서 그런 마음이 묻어난다.
다만 마을 전체가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어 건물 개·보수가 어렵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이 크다. 샤워 시설이 갖춰진 수세식 화장실 하나 만들기가 쉽지 않다.
경주=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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