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작 섞어섞어 '패러디 영화'요리

지난 1일 개봉한 가상 역사극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이시명 감독) 제작진은
최근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하나 경험했다.
영화가 '뚜껑'을 열기 전부터 영화 포스터를
'흉내 낸' 이미지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닌 것이다.
일본 특수수사대 형사로 출연한 장동건과
나카무라 도루가 착용한 무선 마이크는
114 전화 안내원의 장비로 둔갑했고,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광고 문구는 "서비스도
이미 시작되었다!'로 바뀌었다.
영화를 홍보하는 튜브엔터테인먼트의 이선영씨는
"영화 패러디가 유행인 건 알지만
이토록 빨리 반응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영화 패러디 전성시대다. 한국 영화의 시장 장악력이 커지고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영화 풍자까지 유사 문화 현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우리 영화계에서도 '패러디 영화'가 시도되고 있어 주목된다. TV 개그프로나 CF 등에서 부분적으로 차용됐던 영화 패러디가 이젠 하나의 장르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 하는 것일까.
4월 초 개봉할 예정인 '재밌는 영화'(장규성 감독)는 그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투캅스''접속''인정사정 볼 것 없다''쉬리''박하사탕''공동 경비구역 JSA''신라의 달밤' 등 지난 10년간 극장가를 달궜던 한국 영화 33편을 인용하고 있다. 작품 전체가 패러디로 시작해 패러디로 끝나는 최초의 한국 영화다.

'재밌는 영화'는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무산시키려는 일본 공작원과 그들의 음모를 저지하려는 한국 특수요원들의 격돌을 화려한 액션으로 소화할 계획. 설정부터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둘러싼 갈등을 그린 '쉬리'를 연상시킨다. 제작진은 최근 전주시 6차선 대로를 봉쇄하고 '쉬리'의 총격 장면을 재현했다.
'재밌는 영화'를 공동 제작하는 좋은영화사의 김미희 대표는 "작품에서 풍자할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잘 모르고 있다면 영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의 성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패러디 영화에 본격 도전했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의 패러디 추세는 지난해 일기 시작했다. 3류 영화 감독과 무명 시나리오 작가의 사랑을 다룬 '불후의 명작'에선 '마님 사정 볼 것 없다'('인정사정 볼 것 없다'),'박아사탕'('박하사탕') 등 비디오 제작 얘기가 나온다. 지난달 개봉한 '아프리카'에선 한국 영화에 대한 언급이 더욱 직접적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에 실제 출연했던 박영규와 이요원이 전작과 거의 비슷한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또 중간중간 '신라의 달밤''달마야 놀자''조폭 마누라' 등을 거론하며 한국 영화의 '연속성'을 부각했다.
할리우드에선 패러디 영화가 일찍부터 별개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특급비밀''못말리는 비행사''못 말리는 람보''스파이 하드''무서운 영화''나는 네가 지난 13일의 금요일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이 유명하다.

영화 패러디는 사실 방송·광고 쪽에서 더욱 활발하다. 예컨대 KBS2 '개그 콘서트'는 '대충상 시상식''환장하겠네' 코너에서 영화 제목·내용을 순간적 웃음으로 변형시키며 인기를 끌고 있다.
MBC 시트콤 '뉴 논스톱'도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자가 남자의 빰을 때리는 장면, 남녀가 신발을 바꿔 신는 장면 등을 차용했다.
'개그 콘서트'의 김계옥 작가는 "이제 웬만한 오락프로의 기획 회의는 영화를 빼놓고 진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국에 비해 우리 영화의 패러디는 시작에 불과하다. 패러디 열풍이 영화계의 산업·문화적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품격' 높은 풍자가 계속되려면 원작 자체의 구성력·아이디어가 튼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독창적인 콘텐츠 확보가 한국 영화계의 숙제임이 '패러디 바람' 속에서도 그대로 확인되고 있는 것. 김미희 대표는 "패러디는 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이라며 "우리 영화의 역량이 커질수록 패러디의 영역도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재밌는 영화'는 한국 영화계의 또 다른 자신감이다.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친구''접속''쉬리'를 패러디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