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나면 터져… 국민도 나라도 대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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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매일 터져 나오는 무슨 무슨 게이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말이 아니라도 벌써 몇달째 '게이트'가 계속되다 보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정·관가에선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란 말이 나올 정도지만 이들 게이트는 아직도 진행형이어서 어디까지 갈지도 안개속이다.
이용호·진승현·정현준·윤태식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비정상적 경제환경에서 벤처로 초고속 성장을 하며 불법대출이나 주가 조작·횡령 등 불법·편법을 저지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뒤를 봐줄 정·관계의 실력자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로비자금 또는 주식을 뿌린 사건이다. 따라서 이들 게이트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범죄 수법, 사건 진행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가지 맥이 잡힌다.
◇청와대·국정원이 종착역=4대 게이트 모두 청와대와 국정원 인사가 단골로 등장했다. 이들 사건이 권력형 비리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당초의 검찰 수사가 봐주기로 흐른 것도 관련자들이 권력 핵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연루된 청와대 전·현직 인사는 청소를 담당하는 8급 직원(정현준 게이트)에서 구속된 수석(신광옥 전 법무차관, 진승현 게이트)까지 망라돼 있다. 공보수석을 지낸 박준영 전 국정홍보처장(윤태식 게이트)과 이기호 전 경제수석(이용호 게이트)은 불명예 퇴진했다. 윤태식씨의 패스21 주식을 받은 4급 직원은 구속, 이용호씨로부터 선거자금 2천만원을 받은 전 행정관은 불구속 기소됐다.
국정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 2차장 산하 경제단은 경제문제와 관련한 고급정보를 취급하는 데다 정부부처나 기업체 등에 영향력이 막강해 이권에 개입하거나 로비 대상으로 게이트에 연루됐다. 정현준·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김은성 전 2차장·김형윤 전 경제단장·정성홍 전 경제과장은 구속됐다.
엄익준 전 2차장(작고)은 이기호씨의 부탁을 받고 해군에 보물 발굴을 위한 병력과 장비 지원을 요청했는가 하면 해경을 동원해 실제 탐사작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국정원은 윤태식씨의 수지 金 살해범행을 은폐한 데 이어 그의 사업을 비호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의혹사건에 청와대·국정원 등 권력기관 인사들이 줄줄이 연루된 것은 과거 정부에선 드문 일이다. 그동안 "고위직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없는 게 국민의 정부의 특징"이라던 청와대의 주장은 설 땅을 잃었고, 야당은 '패거리 의식의 폐해'라고 공격하고 있다.
◇'설(說)'이 '사실'이 된다=게이트의 공통점은 재수사 또는 특검을 통해 사회문제화됐다는 점이다. 당초의 수사가 '봐주기'였음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증폭되고 수사기관은 망신과 불신을 자초했다.
재수사나 특검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처음엔 연루설을 부인하다가 뒤늦게 시인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金대통령 처조카 이형택씨, 신광옥 전 법무차관,국정원의 김은성 전 2차장, 김형윤 전 경제단장, 정성홍 전 경제과장 등 모두 비슷했다.
정권 내부로부터 흘러나온 '설'이 게이트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점도 특이하다.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윤태식 게이트의 박준영 전 국정홍보처장의 경우 이런 경로를 거쳐 연루설이 드러났다. 특히 국정원의 경우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조차 '인사에 불만을 가진 세력의 조직적 음모'를 거론할 정도로 조직 갈등이 심했던 것이 재수사의 기폭제가 됐다.
◇몸통과 정치자금=앞으로 재수사나 특검을 통해 '최후의 몸통'과 '정치자금'이 어느 선까지 밝혀질 것인지가 최대 관심거리다.
이용호 게이트에서 이형택씨의 윗선, 즉 최후의 몸통으로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에 의혹이 쏠리고 있다. 이기호 전 수석이 이형택씨의 부탁만으로 국정원을 움직여 해군·해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고, 이용호씨도 가까운 인사를 통해 金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에게 접근을 시도했던 흔적이 나타났다.
정치자금 부분은 이미 4·13 총선 당시 진승현·이용호씨 측에서 일부 후보들에게 돈을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으나 불법적인 사업 확장의 뒤를 봐준 대가로 수백억원에서 수조원까지의 로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갔다는 '리스트'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앞으로 진상 규명은 수사팀의 의지 외에 게이트 당사자의 심경 변화나 내부자 폭로 등도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천수 사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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