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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03) 내게 다가오는 적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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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많은 병력으로 전선을 밀어붙이는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아군은 강력한 제공권으로 그 후방을 타격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의 대규모 공세로 아군 전선을 뚫었으나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보급선이 수시로 차단됐다. 사진은 미군이 북한 지역의 철로위에 투하한 네이팜탄이 폭발하는 모습이다. [미 육군부 자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대령으로 9사단의 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그도 나중에 유재흥 군단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현리 철수 때 9사단장 최석 장군은 기백이 있었으나 실전 경험이 없어서인지 허점이 드러나 보였다. 7사단장 김형일 장군은 적의 공세 때마다 뚫려 인접 부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적이 공격하자마자 돌파돼 우리 사단의 통신을 거쳐야 지휘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상대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전술을 선호했다. 그때도 그랬다. 유재흥 국군 3군단장은 정상적인 적의 공격이라면 공격을 개시한 다음 날인 5월 17일 오후쯤 돼야 적이 오마치 고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중공군은 17일 아침 일찍 이미 고개를 점령했다. 기동성을 최대한 발휘해 뒤로 처지는 국군을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옴으로써 아군의 판단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것이다.

3군단은 그렇게 퇴각했다. 오마치 고개를 빼앗긴 상황에서 그들의 퇴로는 방대산을 넘는 길밖에 없었다. 육군본부의 전사 기록을 보면, 당시 3군단의 후퇴는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장병과 노무자, 위문공연단이 한데 뒤섞여 공용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거나 버리면서 방대산을 넘었다. 해발 1400m의 험준한 산악이었다.

퇴각의 대열에는 3사단장 김종오 준장, 9사단장 최석 준장, 군단 참모장 심언봉 준장과 예하 연대장들이 함께 있었다고 했다. 험준하고 높은 산악을 올라야 했던 그들은 무기를 제대로 간수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복장도 엉망이었다.

20일까지 잔여 병력을 모두 수습한 결과 3사단은 전체 병력의 34%, 9사단은 40%가 남아있었다. 보통 각급 부대가 병력 또는 화력의 3분의 1 이상을 잃으면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그런 기준에서 3사단과 9사단의 병력 손실을 보면 와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비참한 패배였다.

중공군은 이미 오마치 고개를 넘어 창촌리와 지금의 영동고속도로 노선에 해당하는 경강(京江·서울~강원도) 도로상의 속사리까지 진출했다. 그전까지 미군은 4만1000발의 포탄을 중공군에게 퍼붓고, 공군기를 165회 출격시키면서 중공군의 공세를 최대한 묶어두려고 노력했다.

전선이 뚫리면서 미 10군단과 내가 이끄는 국군 1군단의 동·서 측방이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군단 사령부를 강릉에서 철수하고 오대산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전선에 수도사단과 11사단을 배치했다. 중공군이 그다음으로 우리 1군단의 수비지역인 강릉을 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강릉이 중공군에게 넘어간다면 상황은 정말 심각해진다. 보급에 허덕이던 중공군은 강릉이라는 대도시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게다가 강릉에는 K-18 비행장이 있었다. 미 해병사단이 그곳에서 병력을 운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보급품을 비롯해 탄약과 포탄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곳을 중공군에게 내준다면 아군 전선은 더 위험해진다.

강릉을 내준다면 삼척이나 포항까지 물러서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동해에 떠있는 미 해군과의 효과적인 협동작전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위기감은 5월 21일 최고조에 달했다. 그때 미 8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관령 서쪽 용평 국군 3군단 간이 활주로에서 작전회의가 있다는 통보였다. 나는 미군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대관령 상공으로 오르자 저 멀리 3군단이 밀려 내려온 지역이 보였다.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마치 화학공장이 폭발한 듯한 연기였다. 미 공군기들은 그쪽에 남긴 국군 장비를 향해 계속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전화와 무선으로 전해 듣던 아군 패퇴의 현장이 너무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 밴플리트(1892~1992)

활주로에는 이미 미 3사단 소속 유진 라이딩스 장군이 도착해 있었다. 광주 경안리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 도착한 증원군 지휘관이었다. 그때 먼 하늘에 L19 경비행기 두 대가 나타났다. 한 대는 적의 공격을 받아 기체에서 가솔린이 흰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행기는 그러나 무사히 땅에 내렸다. 그곳에서 키 큰 장성이 걸어 내려왔다. 처음 대면하는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즉시 지프 보닛 위에다 작전지도를 펴도록 지시했다. 그를 중심으로 라이딩스가 오른쪽, 내가 왼쪽에 섰다. 그가 지도를 가리키면서 “지금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며 입을 열었다. “전선에 큰 포켓(주머니)이 생겼다. 잘 막지 못한다면 심각해진다”고 말한 뒤 밴플리트 장군은 나와 라이딩스 소장을 번갈아 보면서 “두 사람이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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