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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대선 ‘북풍 사건’ 연루 흑금성 간첩 혐의로 구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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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3일 한국의 군사기밀을 북한 공작원에게 넘긴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흑금성’ 박모(56)씨와 방위사업체인 L사 간부 손모(45)씨 등 두 명을 구속했다. 박씨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른바 ‘북풍(北風)사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대북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중국에 체류하면서 대북사업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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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국정원에 따르면 박씨는 2004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뒤 2005~2007년 공작금을 받고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각종 작전교리·야전교본 등을 전달한 혐의다. 국정원은 박씨가 군 기밀사항을 입수하기 위해 접촉한 군 관계자를 찾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방위사업체 간부 손씨도 2005년 군 통신장비 관련 내용을 북한 공작원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또 2008년 ‘북한 주민과 접촉해도 된다’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나 통신중계기 사업 대북 진출을 협의한 혐의도 있다. 손씨는 육군 중령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와 손씨는 서로 아는 사이지만 두 사람이 간첩행위를 공모했는지는 확인 중이라고 검찰은 덧붙였다.

◆‘북풍 사건’의 주역=박씨는 1997년 12월 대선과 관련한 ‘북풍’ 사건의 주역이다. 흑금성은 그의 공작명이었다. 그는 당시 대북사업을 하는 것처럼 위장해 북한 고위층과 접촉하는 임무를 담당했었다. 이를 위해 박씨는 95년 광고기획사인 아자커뮤니케이션에 전무로 위장취업했다. 아자커뮤니케이션은 97년부터 북한의 금강산·백두산·개성 등을 배경으로 하는 TV광고를 찍는 대북사업을 추진했다. 박씨는 북한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사업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맡으면서 북한의 기밀정보를 수집해 안기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국내 정치권 인사들이 베이징 등지에서 북한 고위층과 접촉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당시 이회창 후보 측이 북한에 총격 요청을 했다는 ‘총풍’도 박씨가 수집한 정보였다.

흑금성의 정체는 9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안기부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북한 관련 의혹을 조작했다는 이른바 ‘북풍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전 안기부 해외조사실장이었던 이대성씨가 98년 3월 자신을 수사하면 여당 인사들이 대북 접촉을 한 사실을 공개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1급 대북 비밀문건 3건을 정치권에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흑금성의 정체가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아자커뮤니케이션은 98년 대북사업이 북한의 반발로 전면 중단되자 “사업 중단의 책임이 흑금성을 위장취업시킨 안기부에 있다”며 국가를 상대로 72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2003년 1월 법원은 “국가는 이자를 포함해 8억4000만원을 지급하고 화해하라”는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국가는 이대성씨를 상대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2008년 9월 법원은 “아자커뮤니케이션이 입은 손해 가운데 일부는 문건을 유출한 이씨에게 있다”며 이씨가 배상금의 일부인 2억8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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