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출판] '사람이 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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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인권(人權)에만 매달린 사람은 가짜 같아요. 천지만물에 두루 존엄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대접하는 사람이 참사람 아닐까요."

신간 『사람이 뭔데』 속에는 목권(木權).산권(山權).강권(江權) 등 각종 물권(物權)이 인권과 동등한 무게로 자리를 차지한다.

너도 나도 환경과 생명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오늘, 이런 얘기가 상투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저자의 남다른 이력때문이다. 일제 강점시절에 이미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면서도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 온 저자 전우익(76)옹의 한과 외로움이 거름처럼 녹아있다.

1925년 경북 봉화에서 대지주의 손자로 태어난 저자는 '우익'이란 이름과 달리 해방정국에서 '좌익'활동에 연루돼 6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제 팔순이 멀지 않은 그에겐 지난 세월 인간 세상의 치열했던 이념 다툼조차 인권에만 매달린 속좁은 유행으로 보일 뿐이다.

이 책은 나무와 동물과 자연과 문학을 소재로 한 전원풍 산문의 전형을 보여주는 짧은 글모음이다. 전작인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1993),『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1995)와 형식이 유사하다. 사진작가 주명덕씨가 이번에도 함께 작업을 해 소탈한 촌로의 쓸쓸하면서도 형형한 눈빛을 잘 살려냈다.

"맨날 해봤자 그놈의 소린 그놈의 소릴 수밖에 없는 데 또 지껄였습니다. 너절한 삶과 천방지축으로 읽은 책 이야길 썼습니다."

'너절한'이란 표현은 겸사다. 삶의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는 글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시대,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에서 제 잘난 체 하기만도 바쁜 시대에 한 번쯤 하늘을 쳐다보고 숨을 크게 내쉬게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나무기르기다. 집 앞마당에서 자라는 30여종의 나무 이야기가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나무와 꽃과 짐승은 그에겐 자식같은 생명들이다.

"사람이 뭔데, 인간이 뭔데, 내가 뭔데"라고 되뇌이며 편지봉투에 주소 쓸 때조차 '보내는 사람'의 '사람'을 빼버린다는 그다.

책속엔 나무이야기 외에 도연명과 노신, 그리고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체게바라 평전』에 대한 독후감도 실려 있다.

자연을 이야기하는 그의 지향점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모아진다.

"이야기 나눌 친구 없어 술잔을 들어 외로운 자신의 그림자한테 권한다"는 도연명의 시구(詩句)를 인용하면서 그는 참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는 『체게바라 평전』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한다. 체게바라 때문이 아니다. 체게바라가 포로로 붙잡혀 사형을 앞두고 있을 때 밥조차 주지 않으려는 지휘관들에 맞서 밥을 끝내 가져다 주는 한 여교사 때문이었다.

책도 결국 사람과 만나는 일이다. 책 속의 여교사가 그의 마음을 꽉 채웠기 때문에 더 받아들일 공간이 없어 책읽기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다시 또 마음 속이 서늘해지면 그는 나무를 찾거나 책을 뒤적일 뿐이다.

책 말미에 조선시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의 내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숟가락도 없을 만큼 가난했던 이맹전은 30년 동안 당달봉사 노릇을 하며 궁궐 쪽은 보지도 않았다는 사람이다. 이맹전의 입을 빌려 그는 말한다.

"이 저항방법은 우리 고유의 것이랍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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