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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D-10] 최미나·허정무의 월드컵 일기 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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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아니 그런데,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갑작스레 남편이 기자회견을 열어 최종 엔트리 23명을 발표했단다. 마음속에 이미 엔트리를 정해놓고 나한테는 모른 체하다니…. 하긴 남편은 결정이 내려지면 바로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허정무 감독(왼쪽)이 2008년 11월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사우디아라비아 원정에서 골을 넣은 이근호를 껴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도 엔트리가 나오기 전에 조심스레 23명을 예상해 봤다. 막상 명단이 나오니 내 예상과 다 맞았는데 딱 1명이 달랐다. 이근호 선수였다. 당연히 남아공에 갈 줄 알았는데 탈락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참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선수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근호는 월드컵 예선에서 남편이 어려울 때마다 골을 터뜨려주면서 대표팀 기를 살렸던 선수다. 2008년 10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이근호 선수가 대표팀에서 기록한 골은 무려 7골이다. 그 어린 선수가 남편의 어깨를 항상 든든하게 해줘서, 언젠가 남편이 대표팀 감독을 그만두는 날 그의 두 손을 붙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근호 선수가 탈락한 지금은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인생에 기회가 많이 남아 있어요. 시련을 딛고 일어서면 반드시 햇살이 드는 날이 올 겁니다.”

의외의 발탁자는 이승렬과 김보경이었다. 두 선수는 남편이 용인축구센터에서 총감독을 하던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이 두 선수도 사실 나에게는 고마운 선수들이다. 2000년 대표팀 감독을 그만둔 뒤 남편은 굉장히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세운 게 용인축구센터다. 2001년부터 3년 정도 중·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을 가르쳤는데, 남편이 그렇게 즐겁게 지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수입이 전혀 없었는데도 남편의 얼굴은 항상 밝았다. 용인축구센터를 그만둔 후에도 남편은 “후배를 양성하는 게 꿈”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이승렬과 김보경이 용인축구센터 1기생이니까 남편한테 꿈을 심어줬던 은인들인 셈이다.

허벅지 부상을 당했던 이동국 선수는 결국 발탁이 됐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더니 결국은 자신의 운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동국 선수의 부인 이수진씨는 오늘 오전 홈페이지를 통해 탈락한 선수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어쩌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사려 깊은 수진씨가 대신해 줬다.

엔트리가 발표되고 보니 더욱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시간이 더디 간다. 2010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의 아버지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 같다”는 말을 했다던데, 내가 딱 그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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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전이 열린 날에는 서울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꽃을 한아름 사와 꽃밭에 심었다. 어제 오전에는 냉장고를 다 뒤집고 청소를 했고, 오후에는 커튼과 침대 커버를 다 떼어내 빨래를 했다. 집안일을 아무리 해도 시간이 안 간다. 월드컵이 끝나면 온 집이 반짝반짝거릴 것 같다.

남편이 월드컵 원정을 떠난 뒤 빈 자리를 피부로 느끼는 건 작은딸 은이다. 은이는 아침에 출근할 때 “아빠 언제 와? 아빠 보고 싶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스튜어디스인 은이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남편이 차로 공항까지 데려다주곤 했는데, 아빠 없이 택시를 타거나 공항버스를 이용해야 하니 불편한가 보다. 그래서 내가 “아빠가 늦게 오실수록 좋은 거야. 그러니까 오히려 아빠 늦게 오시라고 기도해라” 하면서 등을 다독였다.

지난해 이맘때 남편, 딸과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에 오른 적이 있다. 보통은 희망봉 바로 밑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가 곧장 봉우리에 오른다는데, 우리는 다른 쪽 봉우리부터 한 시간을 걸어 정상에 올랐다. 정성을 쏟아야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16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돌을 조심스레 쌓아두고 왔다. 한국팀 첫 경기까지는 이제 딱 열흘 남았다.

정리=온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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