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위원회들 헛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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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1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적선동 한국생산성본부 건물 4층 제2건국위원회 사무실.

한창 일할 시간이지만 40여개의 자리 중 15개가 비어 있다. 그나마 자리를 지키는 직원 중 일부는 책상 위에 중국어 교재를 펴놓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 옆의 한 간부 사무실에선 여직원 셋이 모여 큰 소리로 웃으며 잡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위원회가 남아 있을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한 40대 직원의 말이다.

1998년 10월 '민족 화합과 세계 일류 국가 건설을 위한 범국민 운동 추진'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문을 연 제2건국위의 지금 모습이다.

현 정부 들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출범한 각종 위원회들이 파행하고 있다.

국가적 현안들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범정부적 대처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가 곳곳에서 퇴색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연간 수십억원씩 예산을 쓰고 수십명씩의 공무원들을 데려다 놓았지만 기대했던 성과는 올리지 못한 채 일부는 이미 놀고먹는 기구가 돼버렸다.

위원회를 구성하는 민(民)과 관(官) 양쪽의 갈등, 관련 정부 부처끼리의 마찰, 해당 정부 기관과의 불분명한 업무 경계에 따른 기능 중복, 그리고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조정 능력 부족 등이 그 이유다.

2000년 10월 태어난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조사 결과에 불만을 품은 유족들과의 마찰로 지난 15일 양승규(梁承圭)위원장 등 상임위원 3명이 사퇴서를 제출해 업무가 중단됐고, 지난해 5월엔 새만금 개발 문제를 놓고 정부와 부딪쳤던 지속가능발전위는 위원 27명의 집단 사표로 수개월 동안 업무 마비 상태에 빠졌다.

98년 새 정부 출범 후 생겨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통령 직속 또는 독립위원회는 의문사진상규명위.중소기업특위.중앙인사위.제2건국위.지속가능발전위.정부혁신추진위.국가인권위 등 모두 7개. 오는 25일엔 또 하나의 위원회인 부패방지위원회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들 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들은 "정권이 바뀌면 위원회가 유명무실해지는 게 아니냐"며 슬슬 장래를 걱정한다. 스스로 "위원회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갈지 의문이 간다"고 말한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최병선(崔炳善)교수는 "대통령이 임기 중 통치철학을 수행해줄 임시기구의 필요성에서 탄생시킨 위원회들은 정권의 부침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며 "이제라도 활동이 지지부진하거나 유명무실해진 위원회는 과감히 정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주안.정용환.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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