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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준비된 대통령' 어디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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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임기 마지막 해의 연두 기자회견은 '추락하는 대통령'의 현장이 돼버렸다. 감추고 싶은 장면들이 TV 폭로물처럼 실감나게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DJ)의 회견은 과거 YS(김영삼 전 대통령) 때의 모습을 답습했다.

"저것이 대통령의 진짜 모습인가"라는 국민들의 실망감은 반복됐다. 오랫동안 쌓아온 이미지와 권위가 허망하게 헝클어졌다.

*** 감추고 싶은 권력 장면들

5년 전 YS는 국회 노동법 날치기에 성난 여론을 묵살한 채 집권당 대선후보 선출에 개입하려는 자신감을 보였지만 독선과 민심 외면이란 비난을 받았다.

사전 시나리오의 잘 짜여진 '대통령의 말'에 익숙했던 국민들은 "YS가 초점도 못맞춘 채 저렇게 말을 못하는지 몰랐다"고 황당해했다. YS의 인기는 떨어졌고, 그 직후 한보사태 때는 국정운영의 심리적 공황(恐慌)에 빠졌다.

그런 씁쓸한 기억을 가진 국민들에게 DJ의 회견장면은 처연하게 다가온다. '노인정치'의 고단함과 고독이 깔린 표정과 말은 국정의 침체를 상징하는 듯했다.

DJ 정권의 금기(禁忌)였던 '대통령의 건강과 나이'가 여론의 화제로 올랐다. 지난 6일 가족과 77회 생일맞이 식사를 같이했다는 청와대 발표가 있었지만 DJ의 나이를 한국 나이로 굳이 치면 80세다. 오랜 야당생활 중에 DJ는 "나는 돼지띠(음력 1923년생)다.

일제시대 징병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호적에 생년월일을 늦춰 올려 놓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힘내라고 거꾸로 격려해야 하는 노인정치 속에 국정이 꾸려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왜 이렇게 됐는가. 정권출발 때 '준비된 대통령'의 열정과 원숙함은 사라지고 낙담과 비감이 넘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소야대의 어려움 때문인가. 대북문제에 매달려 아랫사람의 부패 등 국내문제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일까.5년 단임제의 숙명 때문인가.

그런 측면도 침체의 요인이다. 그러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 그 핵심 원인은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권력은 군사통치 때나 인권 대통령 때나 생리적으로 탈선과 남용의 유혹에 빠진다. 때문에 권력기관간 상호 견제는 권력 경영의 변함없는 출발점이고 기본이다. 검찰.국정원.경찰.국세청간 협조와 정책조율에는 건강한 긴장과 감시가 담겨야 한다.

취임 초 DJ는 권력기관들을 다루면서 상호 견제쪽보다 인물 교체.인적 청산에 주력했다. 정권교체에 따른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자기 사람 심기가 두드러졌다. '인사가 만사'라는 기본은 소홀해졌고 지연.학연이 힘을 썼다.

권력기관 수뇌부들 간에는 비판과 고언 대신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동지의식이 자리잡았다. 비리가 터질 듯하면 서로 덮어주기에 나섰다. 윤태식 게이트'라는 수지 金 살해범의 교활한 악마의 드라마는 그런 풍토 속에 가능했다.

이용호.진승현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국정난맥에 대한 야당의 비난이나 언론의 질타를 놓고 편가르기 하듯 '수구(守舊)'니 '기득권 저항'이니 하는 반격이 동시 다발적으로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다른 국정관리의 기본은 어려울수록 정면돌파와 정공법의 선택이다. 그러나 DJ 정권은 우회로와 편법을 찾았다.

*** 테크닉 정치에 민심 떠나

야당과 여론을 설득하는 집요함과 정성이 부족했다. 소수정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짜낸 묘수가 일부 시민단체를 동원하는 외곽 때리기였다.

의약분업.교육개혁.대북정책 추진 때도 그랬다. 그런 과정 속에 우리 사회는 '적과 동지'라는 극단적 편가르기, 국론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편법이 거세면 정책은 일관성을 놓친다. 국정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부메랑이 돼버린다.

국정운영의 기본은 제왕적 대통령이나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에서 마찬가지다. DJ 정권 말의 초라함은 기본기에 충실하지 않은 채 테크닉에만 의존하는 운동선수의 비극과도 같다. 기억해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쓰라린 경험이다.

박보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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