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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조폭의 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쩌뚱의 말은 권력과 폭력의 친화성을 표현하는 명제이다.

제국주의 전쟁과 냉전으로 이어진 20세기, 권력의 억압적.권위적 성격 때문에 '권력=폭력'이라는 등식은 심지어 명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60년대 '파워 엘리트'를 써 지식사회에 풍미했던 라이트 밀즈의 '권력의 궁극적 본성은 폭력'이라는 제법 과학적 결론도 20세기적 상황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권력이 어떤 형식으로든 '나의 생각을 타인에 강제'하는 것이 불가피한 만큼 자칫 폭력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권력=폭력을 인정하기에는 도덕적.이념적으로 흔쾌하지 않다. 평화적.민주적 권력에 대한 근원적 희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권력과 폭력을 엄격히 구분한 유태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폭력론』,이후刊)가 위안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동의가 필요한 권력과 달리 폭력은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폭력은 다수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언제나 '긴급한 수단'에 의존한다. 비록 권력이 강제성을 불가피하게 띨 수 밖에 없다곤 하지만, 그것이 시민적 동의 보다 '긴급한 수단'에 의존하게 될 때 폭력일 수 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조폭영화의 흥행에 발맞춰 조폭과 정치권력 사이의 '밀월'이 예사롭지 않다.

물론 어느 시대인들 조폭 장르, 조폭의 정치권력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없었던 적이 있었을까만, 이들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권위의 붕괴에 따라 사적(私的) 폭력이 공적(公的) 권력을 대신하는 경향이 명백하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조폭영화가 조폭과 학교의 결합('친구''신라의 달밤')이라는 점이 주목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학교는 국가권력이 가장 예민하게 작동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곳이다.

그러나 비록 영화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학교가 '폭력의 하위문화를 재생산'하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다.

학창시절의 추억과 폭력의 재미로 거부감 없이 전달되는 영화의 메시지는 기존의 권력에 대한 도전과 희화화(戱畵化)이다. 권위주의 학교문화와 입시위주의 교육계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 기대 학교현장에 작동하는 모든 권력의 정당성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같이 '폭력의 하위문화'를 만들어가는 것과 함께 정치권력도 급격히 조폭에 의해 사유화(私有化)되고 있다. 비록 폭력적이기는 했지만 권위주의 시대의 권력은 스스로를 제도적인 힘으로 뒷받침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의의 부재'로 더이상 존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권위주의가 해체되면서 그에 대신할 '동의에 기반한 권력.권위'를 생산해내질 못했다.

지역주의적 가신에 뿌리를 둔 정치권력은 이런 동의를 얻는데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시민사회가 새로운 시민적 동의를 만들어낼 정도로 성장한 것도 아니다.

정치권력의 '동의의 부재'를 비집고 들어선 것이 바로 조폭이다. 이젠 과거처럼 정당하지 못한 사적.계파적 이해를 제도적 힘을 빌어 관철할 수 없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폭과 정치의 결합은, 계파적 권력이 시민적 동의 보다 '긴급수단'에 의존해 쉽게 이익을 얻으려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조폭'의 사회학적 핵심을 바로 이같은 시민적 동의에 기반한 권력의 부재, 사적.계파적 이해의 권력 공간 침투로 요약한다면, 그 천적은 바로 시민적 동의를 획득하는 시민적 공론의 활성화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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