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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덕담] 2002년은 기회의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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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사회공동체가 밑받침하지 못하는 국가체제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가장 극적인 최근의 예다. 9.11 테러사태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대중의 참여, 즉 민주화가 이 시대의 주류라면 공동체 기반이 취약한 국가체제는 정통성과 효율성 양면에서 극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꿈과 비전, 기본가치와 사회규범을 널리 나누어 가진 공동체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는 놀랄만한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다.

불과 14년 전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란 기치로 이끈 88올림픽은 우리에게는 실로 뿌듯한 추억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 때는 우리의 공동체의식이 하나로 뭉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에 걸쳐 추진한 우리의 근대화작업과 민주화투쟁이 일단 성공해 바야흐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도약한다는 자부심과 기대감이 팽배했다.

그러한 올림픽 무드와 공동체의식에 힘입어 여소야대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의 원천적 변화를 시도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국회공청회와 학계 및 시민단체의 활발한 토론을 토대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으로부터 14년이 지난 오늘, 또 하나의 지구촌 대축전인 월드컵 개막이 1백40일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주도한 우리 사회는 과연 올림픽 때보다 훨씬 더 튼튼한 공동체로 발전했는가? 계층간, 지역간, 노사간, 정당간의 소모적이며 극단적인 대결과 갈등이 줄어들고 끈끈한 공동체의식이 미래로 향한 희망을 북돋고 있는가?

이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아무도 자신있게 내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외면하기보다는 무엇이 공동체 발전의 발목을 잡았는가를 냉정히 진단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번 월드컵축전을 우리의 공동체발전의 걸림돌인 족쇄를 풀어 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진단을 위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해 본다.

우선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목표의 혼란이나 공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 식민지시대에는 주권회복과 독립이,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와 대결한 냉전시대에는 자유와 민주의 수호가, 독재와 군사정권시기에는 민주화가, 그리고 빈곤이 극심한 시대에는 경제발전을 위한 근대화가 국가의 뚜렷한 목표였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막이 내리고 우리의 근대화 및 민주화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본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국민들이 함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선명한 국가목표를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20세기적 발전궤도의 마지막 고비인 선진화의 문턱을 성큼 넘어서지 못한 것은 바로 선진화에 대한 확실한 국민적 결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을 얼마 동안 어느 정도로 희생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이 결여된 엉거주춤한 상황에서 IMF위기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렀던 것이다.

이렇듯 선진화의 문턱에서 세계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조성하는 데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는 어려운 고비마다 안일한 도피처로 작동하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향수였다. 우리 민족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외침에 시달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피해의식이 고착되면서 세계사의 중요한 흐름을 위험한 외세의 음모로 오해하는 치명적 우를 범하게 되었다.

오늘의 정보기술혁명이나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미국이 기획한 국가전략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발전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러한 발전에 어떻게 적응하고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느냐가 우리의 과제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화에 대한 과감한 준비를 주저하고 이를 고질적 내셔널리즘으로 포장하지는 않았는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과도한 피해의식에 못지 않게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선진국 틈에서의 경쟁이 두려운 나머지 후진국 대열에 안주하려는 충동이다. '우리가 무슨 선진국이 되겠느냐'는 이른바 엽전근성은 말끔히 씻어 버릴 때가 됐다. 과대망상도 병이지만 과도한 자기비하는 더 큰 병이다. 우리는 선진국이 될 실력을 충분히 갖춘 나라다.

따라서 후진국 대열에서의 기수 역할보다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참여하겠다는 국민적 선택이 확실히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국민적 선택을 확고히 하는 계기로 올림픽이 조성한 공동체 다이내믹스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활용했는지 돌이켜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열린 공동체다. 안으로는 모든 국민의 참여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민주사회이며 나아가 남과 북의 모든 동포가 함께 복지를 증진하는 민족공동체의 발전이 우리의 통일철학이다. 우리의 이웃인 중국 및 일본과 함께 동북아시아를 북미 및 유럽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이러한 우리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원동력은 바로 국민적 합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다가오는 월드컵 축전이 그러한 공동체적 힘의 활성화에 도화선이 돼야만 한다.

그동안 우리의 공동체가 별로 강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파편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철학과 리더십의 부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목적은 동일성이나 단일성의 추구가 아니라 다양성을 살리는 화합에 있다는 기본 원리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고 리더십의 추구도 화합보다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세력구축을 토대로 진행돼온 측면이 강하다.

공자에 의하면 군자(君子)는 서로 다른 것을 화합시키고(和而不同) 소인(小人)은 같은 것을 서로 다투게 한다(同而不和). 서로 같다는 것, 즉 동(同)이 함께 협조한다는 화(和)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출신지가 같다는 동향(同鄕)이나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동창(同窓)을 강조하면 화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기 쉽다.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지역대결의 문제나 지연.학연에 따른 인사관행은 바로 그러한 소인들이 만들어낸 작태로 공동체의 분열과 약화의 병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를 공정하게 조화 및 활용하는 지혜로운 군자의 리더십이다. 월드컵과 대통령선거를 함께 맞는 올해는 우리 모두가 새로이 새겨두어야 할 원칙이어야 한다.

단일성의 신화에 묶이고 나면 바로 그 같은 것(同)을 지키는 데 몰두하는 수동성 때문에 발전의 경주에서 뒤지기 쉽다.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하고 계속 새로운 화합(和)을 추구하는 창조적 능동성이 열린 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 그것이 바로 선진화를 가능케 하는 민주정치와 시장경제의 원리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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