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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장애인은 움직이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해 1월 22일 수도권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노부부가 타고 가던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 장애인인 부인이 숨지고 남편은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편의시설의 안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항구적 대책 수립을 요구하던 30여 시민단체 사람들이 '장애인 이동권 연대'를 만들어 행동에 나섰다.

*** 처절한'버스 타기 투쟁'

이 단체는 얼마전 시민운동가들이 뽑은 지난해 최고의 시민단체 가운데 2위에 올랐고, 단체의 공동대표인 지체장애인 박경석(노들장애인야학 교장)씨는 한 인터넷 신문에서 '올해의 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선정됐다. 우리나라 장애인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처절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공로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 이들은 "이동할 수 있어야 장애인도 공부하고 일할 수 있다"고 외치며 여럿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 '버스타기 투쟁'을 벌였다. 지난해 2월 서울역 지하철.철로 점거농성을 시작으로 한여름 시내버스를 점거하고 쇠사슬로 자신의 몸과 휠체어를 시내버스 손잡이에 묶은 채 4시간 동안 농성을 했는가 하면, 지난달 19일엔 강추위 속에서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진입을 시도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이 지난 한 해 동안 모두 아홉 차례의 '버스타기 투쟁'을 벌일 때마다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연행이 되풀이 됐다.

이들은 그동안 정부에 세가지를 요구했다. 오르내리기 편리한 저상버스 도입,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설치, 장애인 이동권 보장의 법제화 등이다.1백5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장애인의 40%가 1주일에 3회 이하, 11.7%는 한달에 1회 이하만 외출하고 6.4%는 아예 외출을 못한다는 실태조사를 보면 이들의 이동권 보장 요구가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처절한 외침에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외국에선 벌써 오래 전에 저상버스 운행이 보편화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5년 전 버스 승차대 높이를 78㎝에서 38㎝로 낮춘 버스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지하철의 경우도 사정이 비슷해 수도권 3백66개 역사 가운데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곳은 21%인 78곳에 불과하고, 휠체어 리프트조차 설치되지 않은 곳도 1백68곳이나 된다.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가 절박하다고 모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문제해결은 보건복지부와 건설교통부의 책임 떠밀기로 진전이 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계속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연대측은 오이도역 추락사고 1년을 맞아 오는 22일 열번째 '버스타기 투쟁'과 함께 이 문제를 헌법재판소와 국가인권위에 제소하려고 한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인권 지킴이가 되겠습니다-. 지난 연말 이런 신문광고가 나왔다. 지난해 11월 26일 출범한 국가인권위가 인권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보루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인권위에는 그동안 9백여건의 진정이 쏟아졌다. 공권력 등에 의한 인권침해는 물론 장애인.여성.인종 등을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 인권委에 기대해보지만…

장애인이란 이유로 보건소장 임용에서 제외된 제자를 대신해 인권위에 제1호 진정 접수를 위해 달려왔던 서울대 의대 김용익(金容益)교수의 말엔 분노가 서려 있다. "우리나라에선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다른나라에 비해 장애인 숫자가 적어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장애인들이 나들이 하기 어려운 도로 사정이나 시설물 때문이다. 장애인이 거리에서 휠체어를 타고 단 1백m 앞으로 나가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러나 할 일 많은 국가인권위는 조직구성과 직원 임용 등의 문제로 다른 정부기관과 갈등을 겪으며 아직까지 사무처도 구성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은 이토록 험난하기만 한가.

한천수 <사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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