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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 임금도 바둑으로 자식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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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4000년 된 바둑이 한반도에 건너온 것은 대략 17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삼국지의 조조, 관우 등 수많은 영웅이 바둑을 즐겼으나 바둑의 기원은 여전히 전설 속에 묻혀 있다. 사진은 중국 청 말의 여제 서태후가 바둑을 두는 모습을 그린 그림.

3세기 후반, 장화란 사람이 쓴 박물지에 ‘요조위기(堯造圍棊) 단주선지(丹朱善之)’라는 여덟 글자가 나온다. 사서에 등장하는 바둑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해석하면 요(堯) 임금이 아들 단주를 가르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순(舜) 임금도 바둑으로 어리석은 아들 상균을 가르쳤다. 이 같은 전설 속의 요순창시설은 세월이 흐르며 한·중·일 바둑계의 정설이 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이 붙은 포이의 바둑 창제설도 있다. 말년의 요는 깊은 산중에 사는 선인(仙人) 포이를 찾아가 왕위를 맡아달라고 청한다. 포이가 정치는 싫다, 아들에게 양위하라고 하자 요는 “나의 아들 단주는 완고하고 용렬해 이런 인간이 정치를 하면 세상은 큰 난리를 겪는다”며 다른 계책을 묻는다. 포이는 요의 후계자로 순(舜)을 지목했고 단주를 위해서는 혁평(바둑)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바둑은 폐흥존망(廢興存亡)의 기(技)이기 때문에 이에 몰두한다면 세상에 나와서도 만용을 떨치지 않을 것이다.”

요가 포이에게 바둑을 배워 단주에게 가르치면서 세상에 바둑이 보급되었다는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포악한 군주로 지목되는 하(夏)왕조(BC2050-1550?)의 마지막 왕 걸(桀)의 신하 오조가 바둑의 창시자라고 하는 이설도 있다.

또 당(唐) 말의 문학자 피일휴는 자신의 바둑론에서 “해치지 않으면 패하고 속이지 않으면 망하고 다투지 않으면 잃고 거짓을 꾸미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 이것이 혁(弈:바둑)의 필연이다”라고 말하며 바둑은 전국시대 종횡가들이 창시한 것이고 대 성인인 요의 창작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바둑의 기원에 대한 갑론을박이 재미있다. 바둑서지학자 이승우씨의 새 책 『4000년을 걸어온 바둑의 역사와 문화』는 자신의 주장은 거의 없다. 대신 중국은 물론 일본의 수많은 사료를 통해 ‘바둑’을 보여준다. 새로운 질문도 던진다. 바둑은 팔괘와 닮았다. 바둑판 361로는 일년을 상징하고 네 귀는 춘하추동을 상징한다. 흑백 180개의 돌은 1년의 낮과 밤, 즉 음양을 본받았다. 이처럼 바둑과 역서(易筮)는 동일한 세계관을 지니고 태어난 쌍둥이로 보이는데 기능은 전혀 달라졌다. 역(易)은 하늘의 뜻을 알아내는 기법으로 공적인 기능을 수행했는데 바둑은 승부의 놀이요 기술이 되었다. 바둑도 처음엔 공적인 기능을 지니고 태어났을 텐데 과연 그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바둑의 핵심을 갈파한 기경 13편 등 중국의 옛 기경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겁먹은 자에게 공은 없고 탐욕스러운 자가 먼저 망한다. 연결하면서 스스로를 지키고, 앞 뒤로 접근하고 맞이하며, 느슨함을 공격하고 허를 치고서 본진을 찌른다.”(후한의 대학자 마융의 위기부)

“취사는 바둑의 대계다. 움직이기 시작해서 바둑을 결정하는 것을 취(取)라 하고 돌을 버리고 외세를 펴는 것을 사(捨)라 한다. 바둑은 마음으로 용병하는 것이며 손오의 병법과 합치한다.”(고금의 명수로 꼽히는 송나라 유중보의 기결 중에서)

지독한 한문 투가 읽기 쉽지 않지만 중국의 옛 기경을 처음 한자리에 모았다는 것, 그리고 잊혀져 가는 바둑의 기원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제고하고 있다는 점은 승부 외길인 바둑계의 외양을 넓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박치문 전문기자

◆이승우=1931년생으로 올해 팔순이다. 음성군수, 제천·충주 시장을 역임. 20년 전부터 바둑에 매료돼 일본·중국·유럽 등지로 바둑 탐방 여행을 하며 1500여 점의 바둑 사료를 수집하고 번역 작업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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